처용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관리로 『삼국유사』 처용설화의 주인공이다. 설화상으로는 동해 용왕의 아들로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정사를 도왔다. 역신이 처용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해 동침했으나 노여워하지 않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자 감동하여 향후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문 앞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는 풍습은 여기서 유래한다. 「처용가」와 처용무는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헌강왕 대의 사치와 가무 성행, 호국신의 잦은 출현 등 역사적 배경이 녹아 있는 설화이다.
설화(說話) 상으로는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 하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해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의 정사를 도왔다. 그리고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머물러 있도록 하고, 급간(級干: 級湌)의 관등을 주었다. 아내가 대단히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해 밤에 몰래 그 집에 가서 동침하였다.
이 때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역신은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당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긴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들였다고 한다.
처용이 지어 부른 노래를 「처용가(處容歌)」라 하고, 춘 춤을 처용무(處容舞)라 하여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한편, 처용을 당시 울산지방에 있었던 호족(豪族)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또는 경문왕가와 화랑의 친연성을 고려하여 화랑집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처용이 등장한 헌강왕(憲康王)대는 사치스런 왕경(王京)의 번영과 호국신(護國神)들의 잦은 출현, 가무(歌舞)의 성행 등으로 상징된다. 더욱이 이러한 번영의 모습이 정강왕(定康王)에 이은 진성여왕(眞聖女王) 시기의 혼란과 분열의 모습과 이어져 있어 신라 멸망의 원인을 헌강왕대 사회에서 찾기도 한다. 처용설화 역시 이러한 헌강왕대 정치 사회적 정황의 한 표상인 것이다.
용신신앙, 호국신신앙, 벽사진경(辟邪進慶) 등의 사상은 헌강왕이 속한 신라 하대 신앙의 일단면과 아울러 그 배경이 되는 하대의 사회 · 정치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