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0㎝, 가로 108㎝. 김진(金璡)은 151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우하다가 귀향하여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자식들이 모두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하였기에 세칭 이 집을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일컬었다 한다. 따라서 김진은 조정인(朝廷人)들로부터 숭앙받은 인물이 아니라 가내(家內)의 출충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동인(東人)의 기수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그의 초상화에 대한 내력을 의성 김씨(義城金氏) 청계공파 세보로부터 살펴보면, 이 초상화는 생시(生時) 진상(眞像)으로서 그 당시에는 선유암(혹은 선유정)이란 암자의 스님으로 하여금 보관케 했다고 한다. 10대손 김상수(金常壽)의 『지려유고(芝廬遺稿)』를 보면 김진이 73세되는 1572년 이 초상을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후손인 김시정(金始亭)에 이르러 이 초상화를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이안하던 중 영정이 훼손되자 새로 부본(副本)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빈서원기(泗濱書院記)」에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 종중에서는 원본 및 부본을 함께 받들고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원본은, 화폭의 윗부분은 3폭을, 아랫부분은 4폭을 연폭(聯幅: 이어서 붙임)으로 결봉(結縫)하여 모두 7폭으로 되어 있다. 초상화의 형식을 보면, 평량자형(平凉子形)의 입(笠)을 쓰고 있다. 위로 높이가 상당하고 테 또한 넓다. 이러한 형태에 걸맞게 길고 가는 입영(笠纓: 갓끈)을 부착하고 있어서 김진 생존 시의 모제(帽制)와 상합된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는 표피이면서 가장자리의 띠를 둘렀다. 빛 바랜 녹포(綠袍)를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부좌(趺坐: 두 다리를 틀어 얹고 앉음)한 자세는 두 눈을 내리뜨고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과 조화되어 청계공 김진의 성격을 암시해 준다.
안면 처리는 구륵(鉤勒: 윤곽을 그리고 채색하는 법) 위주의 윤곽선 처리를 기조로 하고 있다. 단지 코를 중심한 보필(輔弼) 및 협(頰: 뺨)과 법령(法令: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부위에 약간의 담홍색 선염(渲染)을 집어넣어 안면의 오목한 부위를 나타내고 있다. 바랜 녹색계 야복의 옷주름 처리는 비수(肥瘦: 살찌고 여윔) 없는 선으로 표현되어 고식(古式)을 보여 준다.
초상화에 부분적인 가채(加彩)의 흔적은 사빈서원으로 이안했을 때 보수한 흔적으로 보인다. 김진초상은 김시습(金時習)초상, 이현보(李賢輔)초상 등과 같은 계열의 조선 중기 평량자형 입제(笠制)의 야복본(野服本) 초상화 계열로서 관복을 갖추어 입은[正裝官服本] 정형화된 형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