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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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초상
김진 초상
회화
유물
문화재
조선시대 문인 김진(金璡)의 영정.
이칭
이칭
청계김진영정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95년 07월 19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1997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목차
정의
조선시대 문인 김진(金璡)의 영정.
개설

199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0㎝, 가로 108㎝. 김진(金璡)은 151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우하다가 귀향하여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자식들이 모두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하였기에 세칭 이 집을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일컬었다 한다. 따라서 김진은 조정인(朝廷人)들로부터 숭앙받은 인물이 아니라 가내(家內)의 출충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동인(東人)의 기수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내용

그의 초상화에 대한 내력을 의성 김씨(義城金氏) 청계공파 세보로부터 살펴보면, 이 초상화는 생시(生時) 진상(眞像)으로서 그 당시에는 선유암(혹은 선유정)이란 암자의 스님으로 하여금 보관케 했다고 한다. 10대손 김상수(金常壽)의 『지려유고(芝廬遺稿)』를 보면 김진이 73세되는 1572년 이 초상을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후손인 김시정(金始亭)에 이르러 이 초상화를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이안하던 중 영정이 훼손되자 새로 부본(副本)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빈서원기(泗濱書院記)」에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 종중에서는 원본 및 부본을 함께 받들고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원본은, 화폭의 윗부분은 3폭을, 아랫부분은 4폭을 연폭(聯幅: 이어서 붙임)으로 결봉(結縫)하여 모두 7폭으로 되어 있다. 초상화의 형식을 보면, 평량자형(平凉子形)의 입(笠)을 쓰고 있다. 위로 높이가 상당하고 테 또한 넓다. 이러한 형태에 걸맞게 길고 가는 입영(笠纓: 갓끈)을 부착하고 있어서 김진 생존 시의 모제(帽制)와 상합된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는 표피이면서 가장자리의 띠를 둘렀다. 빛 바랜 녹포(綠袍)를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부좌(趺坐: 두 다리를 틀어 얹고 앉음)한 자세는 두 눈을 내리뜨고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과 조화되어 청계공 김진의 성격을 암시해 준다.

안면 처리는 구륵(鉤勒: 윤곽을 그리고 채색하는 법) 위주의 윤곽선 처리를 기조로 하고 있다. 단지 코를 중심한 보필(輔弼) 및 협(頰: 뺨)과 법령(法令: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부위에 약간의 담홍색 선염(渲染)을 집어넣어 안면의 오목한 부위를 나타내고 있다. 바랜 녹색계 야복의 옷주름 처리는 비수(肥瘦: 살찌고 여윔) 없는 선으로 표현되어 고식(古式)을 보여 준다.

초상화에 부분적인 가채(加彩)의 흔적은 사빈서원으로 이안했을 때 보수한 흔적으로 보인다. 김진초상은 김시습(金時習)초상, 이현보(李賢輔)초상 등과 같은 계열의 조선 중기 평량자형 입제(笠制)의 야복본(野服本) 초상화 계열로서 관복을 갖추어 입은[正裝官服本] 정형화된 형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참고문헌

『지려유고(芝廬遺稿)』
『초상,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한국국학진흥원, 2009)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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