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숙 ()

목차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아찬 석품과 함께 모반을 계획한 주모자. 대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31년(진평왕 53)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이찬(伊?)
관련 사건
칠숙·석품의 모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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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아찬 석품과 함께 모반을 계획한 주모자. 대신.
개설

칠숙(柒宿)의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631년(진평왕 53) 5월 아찬(阿湌) 석품(石品)과 함께 모반(謀叛)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9족(族)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석품은 도망가서 백제 국경까지 이르렀다가 처자식을 보기 위하여 나무꾼으로 변장하여 신라로 돌아왔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내용

칠숙의 모반은 진평왕(眞平王)의 말년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 원인에 대해서 대부분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견해들은 다시 왕권(王權)과 진골귀족(眞骨貴族)의 대립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진골귀족 내부의 대립과 갈등으로 파악하는 등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칠숙의 모반 원인을 왕권과 진골귀족과의 대립으로 파악한 견해는 진평왕 이후에 여자인 선덕여왕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칠숙의 모반을 선덕왕대 발생한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의 반란과 함께 씨족(氏族)의 집단주의 이념과 왕자지배의식(王者支配意識)의 갈등으로 파악하거나 왕권과 화백권(和白權)의 대립,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으로 대표되는 신흥계와 타협한 왕실에 대한 불만이라고도 본다. 또는 진평왕 말년 선덕여왕을 왕위계승자로 정한 것에 대한 진골귀족의 반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진골귀족 내부의 대립과 갈등으로 파악한 견해는 김용춘의 사륜계(舍輪系)와 김서현의 가야계(加耶系)를 신귀족세력(新貴族勢力)으로, 기존의 신라 전통귀족을 구귀족세력으로 구분한 뒤, 칠숙의 모반은 신귀족세력을 제거하고 진평왕 이후 왕위추대권을 확보함으로써 범내물왕계(汎奈勿王系) 귀족중심의 연합정치(聯合政治)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신귀족세력인 사륜계가 득세해가는 당시 정세에 대한 구귀족세력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최근에는 칠숙의 모반은 단순히 왕권과 진골귀족의 대립이나 진골귀족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진평왕 후기의 정국운영에서 급성장한 사륜계에 대한 불만과 더욱이 그들에 의해 진평왕의 장녀인 덕만(德曼)이 왕위계승자로 결정된 것에 대한 구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칠숙의 모반으로 칠숙의 9족(族)도 함께 처형당하였는데, 신라에서 9족을 처형한 경우가 처음이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당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칠숙의 모반을 진압한 주체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사륜계에 의해서 진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그 사건을 진압한 세력 즉 사륜계인 김용춘과 가야계인 김서현 등의 정치적인 위상이 크게 높아지면서 정국운영은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두 세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의 정국운영도 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김용춘이 선덕여왕의 즉위 초에 왕의 고유한 통치 행사권의 하나였던 지방순무(地方巡撫)를 대행함으로써 상당한 정치활동을 수행하였다는 데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중고기(中古期) 반란(叛亂)의 원인과 성격」(김덕원, 『민족문화논총(民族文化論叢)』38, 2008)
『통일전쟁기 신라 정치세력의 구성과 변화』(박용국,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진평왕 말기의 정국과 선덕왕의 즉위」(박정숙, 『백산학보』52, 1999)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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