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칠장사 사천왕상은 나무로 뼈대를 하고 진흙으로 조성한 소조상으로, 칠장사를 수호하는 신장(神將)이다. 당시 사천왕상에 비하여 다소 작은 편이며 의좌상(椅座像)을 하고 있다.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추측된다.
서남향의 칠장사 천왕문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 대웅전에서 ㄱ자로 구부러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왕문 안에는 4구의 사천왕상이 좌우에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다.
천왕문의 입구를 중심으로 하여 오른편의 앞쪽 천왕상은 칼을 들었고, 대웅전 쪽 천왕상은 비파를 들고 있다. 왼편의 앞쪽의 천왕상은 오른손에 용을 잡았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如意珠)를 집고 있으며, 대웅전 쪽 천왕상은 오른손에 당(幢)을 잡고 왼손은 허리에 대고 있다.
이 사천왕상들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로 소조상의 질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눈썹과 수염은 곱슬인 듯 동글동글하게 말려 있고, 길게 늘어진 귀에는 구슬형의 귀걸이를 달고 있다. 머리에는 4구 모두 비슷한 모양의 화려한 보관을 썼고 머리의 양옆으로 보관 끈이 휘날리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허리 부분이 길게 드러나 있는 신체에는 보통 조선시대 사천왕상처럼 갑옷을 걸쳤다. 그러나 팔을 구부리고 있는 자세가 조금 어색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 제작자의 기술이 그다지 숙달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갑옷 위로는 천의(天衣)가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며 신체에 붙어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불꽃무늬는 생략되어 있다.
기다랗고 굴곡이 심하지 않은 허리 부분은 직지사(直指寺) 사천왕상이나, 1624년 법주사 사천왕상과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세장하고 강직한 1515년 보림사 사천왕에 비하여 평판적이고 친근감이 드러나기 때문에 17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사천왕상의 양쪽 발밑에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 버둥거리는 악귀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모두 심하게 부서져 있는 상태이다.
이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17세기 전반으로 추측하고 있는 이유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위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부친 김제남(金悌男)과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찰(願刹)로 삼아 여기서 기도 정진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목대비는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 『금광명최승왕경』 1책(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을 사경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은 사천왕 신앙의 소의경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197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보물로 승격된 친필 족자에 시 한 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7세기 전반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조선은 국가적인 복구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사천왕상을 조성할 때도 비교적 값싼 재료인 소조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17세기 전반기 대형소조상의 유행과 일맥상통하다.
이 사천왕상은 험상궂거나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친근감이 넘치는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보편적인 모습을 갖춘 작품이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 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