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토월회(土月會)가 당국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1932년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전 토월회의 주요 구성원과 현철(玄哲) 등을 규합하여 토월회를 태양극장(太陽劇場)으로 개칭하였다. 이 극단에는 당시 가장 각광을 받고 있었던 신인 여배우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동참하였다.
이 극단은 연출부에 박승희, 극작에 박승희와 박진(朴珍), 장치·조명부에 원우전(元雨田)·전일(全一)·염유일(廉唯一), 연기부에 이소연(李素然)·이백수(李白水)·박제행(朴齊行)·석금성(石金星)·김연실(金蓮室)·강석연(姜石燕)·김선영(金鮮英) 등 모두 토월회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 극단은 창립공연으로 1932년 2월 6일 종로 5가에 있던 미나도좌(座)에서 남궁 춘(南宮 春)작 「명나라 원나라」, 박승희 편 「스타가 되려고」·「애곡」 등을 공연하였다. 제2회 공연은 박승희 작 「아리랑고개」와 박진 편 희극 「나무아미타불」을 단성사에서 올렸으며, 제3회 공연은 박승희 작 「요부(妖婦)」,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국교단절(國交斷絶)」등을 역시 단성사에서 공연하였다. 제4회 공연에서는 박승희 작 「이대감 망할대감」과 편작 「부활」 등을 공연하였다.
이 밖에도 「월급날」·「짙어가는 가을」·「카페의 애화(哀話)」·「사막의 광상곡」·「그리운 무대」 등을 공연하였으며, 이때 안종화(安鍾和)·심영(沈影) 등 새로운 인물들이 출연하였다.
또한 천보산인(天寶山人) 각색 「춘향전」, 박승희 작 비극 「아버지」·「과도기의 애화(哀話)」·「우리 선생님」, 남궁 춘(南宮春) 작 「첫출근」 등도 공연하였는데, 이 시기 서월영(徐月影)·이애리수·최옥희(崔玉姬)·조영숙(趙英淑)·안인표(安仁杓)·최명화(崔明華)·김민자(金敏子)·이정자(李貞子)·김영애(金英愛) 등 많은 신인배우가 등장하였다.
이후 극단은 이서구(李瑞求) 작 「인육(人肉)의 시(市)」, 남궁 춘 편 희극 「강짜 독본이과(讀本二課)」를 비롯하여, 박진 편 「엉터리 전주부(全主簿)」·「울며 겨자먹기」 등의 희극과 이서구 작 폭소희극 「그는 왜 기절했는가」 등 많은 작품을 올렸다.
1936년 이후에는 극단명을 애원좌(愛園座)로 개칭하고, 주로 지방 유랑공연 길에 올라 이미 공연된 작품들을 바꾸어가며 재상연하였으며, 북간도에서 만주, 그리고 일본 대판(大阪)까지도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1940년에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자연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