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제목은 『The Korean Pacific Weekly』이다. 이 신문은 1913년 9월 20일 이승만(李承晩)이 주재하여 발간한 『태평양잡지』를 제호와 체제를 바꾸어 1930년 12월 13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한 것이다. 주필은 이승만이 직접 맡았으며, 민찬호(閔燦鎬)·윤치영(尹致暎) 등이 필자로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1942년 1월 21일 하와이에서의 외국어신문의 발행금지조처에 따라 한때 정간되었다가, 1942년 1월 21일부터 1944년 2월 2일 사이에는 『국민보』와 합동으로 『국민보-태평양주보』라는 제호로 발행되었다. 1944년 2월 2일에는 『국민보』와 분리하여 다시 『태평양주보』로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 판형과 체제로 발행되었는데, 1945년까지는 B5판 크기의 소책자 형태로 국문 8면, 영문 4면으로 총 12면을 발행하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7월 14일에 전황에 대한 상세한 보도의 필요성을 느껴 체제를 표준판 신문체제로 바꾸었다. 1949년에는 호놀룰루 킹 스트리트(King St.)에 동지회관(同志會館)이 신축되자 이곳에서 계속 발행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활판인쇄(活版印刷)를 하지 못하고 타이프라이터에 의한 등사판인쇄 방식의 소형신문(小型新聞)으로 바뀌어 195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재정난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0년 2월 종간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주로 보도기사와 논설이 실렸으며 광고도 게재하였다. 1945년 3월 3일자에는 「조선의 자치능력」이라는 논문을, 3월 24일자에는 「독립 후 조선의 식량문제」에 대한 논문을 게재하는 등 장차 독립국가로서의 조국의 장래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 8·15광복 전에는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식이나 조국의 독립문제 등을 크게 다루었으며, 태평양전쟁 중의 미군의 자세한 전승기록 등을 실었다. 그 뒤에는 교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고국의 소식 등을 보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