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는 밀려오는 큰 파도나 불어닥치는 태풍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여기에다 해륙(海陸)의 접속지대가 되므로 예로부터 해양진출의 거점으로 기능해 왔다. 기능이 분화될 경우 어업, 해운, 군사기지로서 유형을 구분하게 된다. 포구는 선박을 이용하는 장소이기에 정박장소가 되는 계류장(繫留場)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포구를 중심으로 계류장이 설치되고, 해운 장비인 각종 선박이 정박하며, 종사자 가옥이 집중된 거주공간을 포구취락으로 규정하였다.포구취락은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의 요지에 형성되며, 해양과 육지의 중계장소로 선박을 이용한 물자의 교류가 가능하고 해양과 내륙진출의 결절점이 된다. 포구취락은 강변에 위치한 강상포구(江上浦口)와 해안가에 위치한 해상포구(海上浦口)로 나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상황에서 부속 도서는 물론이고 해외 교류는 포구취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특히 황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호남지방에서 일찍부터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국제교류의 거점 역할도 수행하였다.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는 이미 신라 시대에 처용(處容)의 상륙 설화가 깃든 포구취락으로 알려졌다. 처용이 고비심목(高鼻深目)으로 표현되듯 외국인의 용모를 갖추고 있으므로 해외교류의 거점인 것이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산업활동의 메카’라 할 만큼 공업도시로 급성장한 울산이 개운포의 전통을 계승한 점이다.
황해에 자리한 전라남도 영광군의 법성포(法聖浦)는 백제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포구취락으로 알려졌다. 땅 이름에도 불교의 ‘법문(法文)과 성상(聖像)’이 해상 루트를 따라 도래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후 칠산해(七山海)에 기초한 조기의 파시전(波市田)이 형성되면서 어업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오늘의 ‘영광굴비’는 이때에 기원한 조기의 염장품(鹽藏品)이다. 황해에 접한 소래포구, 김포의 대명포구 등도 포구취락에 해당한다.
중종 때에는 진영을 설치하여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고, 숙종 때에는 첨절제사를 둠으로써 군사 기능을 추가하였다. 이것은 전세(田稅)를 수거하고 검량(檢量)하여 서울로 수송하기 위함이다. 근거지를 위하여 둘레가 1,688척에 이르는 성곽을 쌓았으므로 이 유규(遺構)는 포구 기능을 뒷받침해 온 흔적으로 남는다.
오늘의 취락형태는 해안선을 따라 발달함으로써 호상(弧狀)을 드러내고 있지만, 배후 사면을 활용함으로써 높고 낮은 입체 경관도 표출되고 있다. 취락의 골격을 이루는 간선도로를 따라 수협, 냉동시설, 어구상, 철공소 등 어업 기능과 관련된 시설이 집중해 있다. 이것은 기능 복합의 양상에서 어업 일변의 단순화된 모습으로 포구취락이 탈바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남해안에도 최대의 섬인 제주도와 연결을 위해 포구취락이 발달해 왔다. 신라시대의 탐진(耽津)이 대표적이며,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터’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최단 코스의 이진(梨津)이 활기를 띠었다. 이진이 완도와 인접해 있음을 감안할 때 완도∼제주로 이어지는 오늘의 직항로는 현대적 장비를 활용한 예전의 루트를 복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도에는 조천포(朝天浦)가 거점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연북정(戀北亭)이 남아 있어 이곳이 ‘북쪽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해상교통의 거점임을 읽을 수 있다. 제주도에 형성된 포구취락에는 애월포(涯月浦)·금녕포(金寧浦)·차귀포(遮歸浦)·명월포(明月浦) 등이 있다.
강변에 자리한 강상포구로 대표적인 곳은 강경이다. 금강변에 있는 강경은 금강을 통해 거슬러 올라오는 바닷배의 정박지가 형성되면서 물자교류의 장이 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포는 영산강변에서 발달하였고, 경상남도 하동군에서는 섬진강변에 개치포구가 형성되면서 취락이 발달하였다. 근래 들어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하구둑이 건설되는 등 포구의 기능이 쇠약해지면서 포구취락도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