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poster)

금연포스터
금연포스터
회화
개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지면 위에 문자 · 그림 · 사진 등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광고물. 회화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지면 위에 문자 · 그림 · 사진 등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광고물. 회화용어.
개설

포스터(영어 poster, 프랑스어 affiche, 독일어 plakat)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정보 디자인(information design)이라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는 시각 전달 디자인(visual communication design)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다. 공고, 광고, 홍보 등을 위한 메시지, 또는 정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시각적(視覺的) 형식을 효과적으로 구성한 모든 조형물을 포스터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포스터를 중국 사람이 발명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공문서나 포고문 등을 써 붙인 공고(公告)도 일종의 포스터의 원형으로 본다면, 방(榜, 또는 榜文)은 우리나라 포스터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현대적인 의미의 포스터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생겼다. 똑같은 전달 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대량으로 인쇄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세기 초 서양에서 유행했던 원색 석판 인쇄술(石版印刷術)은 포스터를 발달시킨 중요한 동인이었다. 당시 많은 미술가들이 원색 석판 인쇄에 관심을 보이면서 예술적 수준에까지 이른 포스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의 포스터를 미술 포스터(art poster)라고 부른다.

1858년 프랑스인 쉐레(Cheret. J, 1836∼1932)가 제작한 「지옥의 올훼」라는 포스터는 최초의 원색 석판 인쇄 포스터로 알려진다. 쉐레의 대중적인 포스터는 민예품이나, 장터의 매점 간판, 서커스 간판에 등장하는 그림이나 글자와 같이 간결하고 평면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쉐레의 그래픽 표현은 르네상스 이후 입체적인 명암법과 원근법에 기본을 둔 전통적인 미술의 관행을 파괴한 것이었다. 이 대중적인 포스터는 그래픽 디자인의 중요한 기법으로 응용되었고 로트렉(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과 본나르(Pierre Bonnard, 18671947),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 등 근대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간결하고 평면적인 형태, 장식적인 선, 강한 음영 콘트라스트, 풍자적이고 유머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는 당시의 회화적 인습 속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화가들이 석판 인쇄로 제작한 원색 인쇄 포스터들이 나붙은 프랑스 파리의 거리를 ‘거리의 미술관’이라고까지 불렀다.

19세기의 이러한 포스터들은 본격적인 광고의 성격이라기보다는 회화적 특성이 강해서 20세기 미술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근대 회화에서 보이는 간결한 양식적 묘사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성격은 대중적인 포스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산업 사회로 발전하면서 전문적인 포스터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색 인쇄술도 더욱 발달하게 되어 다양한 포스터들이 나오게 되었다. 포스터와 같이 인쇄, 복제하는 것도 예술의 한 분야가 되었고, 판화(版畵, graphic art)와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로 분화하게 되었다.

내용

광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포스터의 형식과 종류 그리고 표현 기법이 다양해졌다.

포스터는 전달 내용(정보)에 따라 정치 포스터, 사회 포스터, 문화 포스터, 상업 포스터, 장식 포스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치 포스터는 정치 선전과 관련되는 내용이며, 사회 포스터는 사회 공공 캠페인이나 공익 광고, 계몽 등을 위한 포스터이다. 문화 포스터는 문화 예술에 관한 포스터, 스포츠 포스터는 스포츠와 관련된 포스터이며, 상업 포스터는 상품이나 기업을 선전하는 포스터이다.

장식 포스터는 선전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포스터 그 자체가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포스터로서 1960년대 대중문화의 확산과 함께 등장하였다. 장식 포스터의 이미지는 주로 대중들의 우상이었던 가수, 연예인, 제3세계의 정치가 등 대중의 숭배 인물을 표현 대상으로 삼아, 강렬한 색채 대비, 형광 색채, 강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극적인 그래픽 등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값비싼 그림 대신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대중 예술품으로서 일반 대중의 감각에 맞아 1970년대 서방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하나의 사업이 되기도 했다. 1960∼70년대에 유행한 사이케델릭(Psychedelic) 포스터도 이러한 경향에서 비롯된 일종의 장식 포스터였다.

한편 포스터는 주제에 따라 전쟁 포스터, 전시회 포스터, 연극 영화 포스터 등으로 세분할 수도 있다.

포스터는 광고나 선전의 기능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시각 예술의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포스터의 제작자들은 그 목적을 충실히 실현하는 범위 안에서 예술적인 수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포스터는 상업성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예술성을 달성하는 데에 제한을 받을 때가 많다. 목적에 맞고, 효과적인 디자인의 광고는 많지만, 예술적 수준의 광고를 보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비상업적인 문화 포스터 가운데에는 예술적 수준에 도달한 훌륭한 포스터들이 많다. 특히 1950∼60년대 이후 폴란드의 문화 포스터(연극·공연·전시 포스터)는 공산주의 문화 예술의 탄압 속에서도 예술이 포스터 형식을 통해서 살아남았던 좋은 본보기이다. 폴란드에서 제작된 포스터는 예술적 수준이 높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포스터 제작현황

우리나라 초기에 나타난 포스터는 문화적 가치를 부여할 만한 포스터를 찾기 힘들다. 광복과 더불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행사를 위한 포스터들이 제작되었으리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인쇄 기술의 미숙함과 또한 미술가나 전문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없이 인쇄소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졸속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잡지나 문학지 표지의 디자인과 인쇄 수준을 보면 가늠할 수 있다.

광복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포스터의 발자취는 포스터의 일회성과 일상성이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그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1945년∼1950년: 6·25 동란까지의 시기는 주로 건국 준비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 수립기념 포스터, 정당 선전 포스터, 각종 계몽 포스터(예: 쥐잡기, 왜색 말살, 구강 위생, 저축 장려 등), 영화 포스터, 약품 광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대부분은 당시의 인쇄소 화공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드물게는 당시의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졸업생들에 의해서 디자인되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것은 1945년 12월한홍택(韓弘澤)이 조직한 한국산업미술가협회 회원들의 전시회를 통해서 포스터가 일반인에게 미술의 한 형식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응용 미술가, 산업 미술가, 상업 미술가로 불렸던 전문가들이 포스터 제작에 부분적이나마 관계했다. 1946년 8월서울대학교 예술학부에 응용미술과(현재의 산업디자인학과)가 생겼다. 그리고 이어 각 사립 대학에 응용 미술 관련 학과의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우리나라의 포스터 제작(디자인)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② 1950년∼1960년: 이 기간은 전쟁 포스터들이 많이 쏟아졌던 시기이다. 6·25 전쟁 기간 동안 교과서도 전시 교과서 체제로 바뀌었다. 각종 징병 포스터, 모병 포스터, 국방부에서 제작한 선무 작전을 위한 포스터, 정부에서 제작 배포한 반공 포스터 등이 거리를 장식하였다. 우리나라 전쟁 포스터들은 그 디자인 수준이 틀에 박힌 기법의 것이었다고 해도 전쟁 기간 중에 국론을 한데 모으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포스터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③ 1961년∼1969년: 1961년 5·16과 1963년 제3공화국의 공업 근대화 정책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현대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산업과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응용 미술이라는 인습적인 개념은 현대적인 디자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또 이 시기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의 가전 제품을 비롯한 공업 생산 제품들이 일상 생활화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따라서 포스터 부문에서도 그 전에 볼 수 없던 경제 개발 정책 선전 포스터, 상품 포스터, 관광 포스터가 많이 등장하였다. 이 포스터들은 세련된 일러스트레이션, 원색 사진을 사용하는 등의 현대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수준 높은 디자인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인상적인 포스터로는 1962년 서울국제음악제의 개최를 위한 시리즈 포스터가 조영제(趙英濟), 민철홍(閔哲弘), 한도룡(韓道龍)에 의해서 디자인되어 서울의 거리를 장식하였다. 전지 크기의 6가지 음악제 포스터는 그 구성과 색채 면에서 지금까지의 포스터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현대 감각을 가진 포스터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출 지향 경제 개발 정책에 발맞추어 디자인 진흥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들이 등장했다. 1966년상공부가 주관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1977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개최되고 있는 공모전)의 제1부에는 세련된 디자인의 현대적인 포스터 시작품(試作品)들이 출품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포스터들은 이 공모전을 통하여 자격을 인정받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나 각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디자인되는 관행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포스터를 의뢰하는 기업이나 기관의 경제적 여건, 포스터 부착 장소의 제한, 광고 선전 매체로서의 효용성이 점차 줄어들어 전문 디자이너에 의한 수준 높은 포스터가 실제로 인쇄 제작되어 배포되는 일은 드물었다.

④ 1970년대: 1970년 이후부터 거의 대부분의 포스터들이 전문 디자이너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광고 대행사들을 중심으로 광고 산업이 급성장했으며, 기업의 광고 선전 물량이 많아지면서 상품 선전 신문 광고와 함께 상품 포스터들이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광고 선전물 이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각 기업과 광고 대행사 그리고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에 근무하는 디자인 교수들로 구성된 시각디자인 협회들이 발족되고 이들이 연구 작품 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1972년 이후 한국 시각디자인협회(1972∼1994)와 군소 그래픽 디자인 단체들의 회원 작품전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 작품이란 모두 포스터 형식을 통한 비 상업적인 주제를 다루는 내용들이며, 인쇄되지 않은 가상의 시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전시장 이외에 사회적으로 크게 파급되지는 못했다.

⑤ 1980년대: 1981년 컬러 텔레비전 방영을 위시해서 1980년대 국내 시장 개방 정책, 해외 여행 자유화, 1983년한국 시각디자인협회의 세계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Icograda) 가입, 1984년 아시아광고회의 서울 개최,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개최 등은 그래픽 디자인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2년 서울의 세계올림픽대회 개최가 결정되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안에 디자인 전문위원회가 생겨 올림픽 공식 포스터뿐만 아니라 문화 포스터 그리고 올림픽 CI 디자인(Corporate Identity design) 등을 체계화하려는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포스터 발전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디자이너들이 출판 디자인, 신문과 텔레비전 광고 디자인, CI 디자인에 종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포스터는 더욱 더 디자이너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앰블렘 포스터(양승춘 작)와 마스코트 포스터(김현 작) 그리고 대회 공식 포스터(조영제 작), 올림픽 대회 문화 포스터 등이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의해서 제작되어 국내외에 배포되는 정도였다.

⑥ 1990년대: 우리나라는 다른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비해 포스터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외국 선진국의 주요 도시의 대형 옥외용 인쇄 포스터들은 도시를 생동적이게 하는 요소로 존재하며 그 디자인 수준도 높다. 역사적으로 스위스의 대형 옥외 인쇄 포스터는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초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들이 유럽의 현지 광고 대행사에 디자인을 의뢰하여 제작한 대형 옥외 인쇄 포스터(1996년)가 유럽의 여러 도시에 나붙었던 예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포스터란 길거리 벽면에 무질서하게 붙어 있는 광고물 정도로 인식되었다. 대형 옥외 포스터 대신에 대형 전자 광고판에 텔레비전 광고가 그대로 방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오늘날 포스터 본래의 매체로서의 역할이나 성격은 1980년대 컬러 텔레비전과 영상 매체의 급속한 발달, 그리고 1990년부터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포스터는 그 기능과 존재 가치가 점점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미술 작품처럼 자신의 아이디어 표현을 위해 실제로 통용되지 않는 가상의 포스터를 창작하여 화랑을 통해 전시함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도의 정보 산업 사회에서 인쇄 포스터의 사회적 요구는 축소되고 있지만, 그래픽 디자인 또는 시각 디자인 교육에서는 아주 중요한 공리교육(公理敎育)의 한 방법으로서 계속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각종 공연이나 이벤트, 문화·관광 전시, 광고 산업 분야에서는 아직도 그 효용가치가 있어 수준 높은 포스터의 출현이 기대된다.

참고문헌

『포스터의 역사』(존 바니코트, 정시화 옮김, 미진사, 1979)
『한국현대미술사』(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 1978)
Graphic Styles (Steven Heller & Seymour Chwast, London: Thames and Hudson, 1988)
The Poster In History (Max Gallo, New York: MacGraw-Hill, 1972)
The French Poster (Jane Abdy, London: Studio vista, 1969)
Lffiche (Lo Duca, Paris: Que sais-je 153,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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