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14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1기가 지정되었다. 원래 위치인 학익동은 지금은 완전히 내륙의 시가지가 되었지만 원래는 바닷가에 임한 경사 완만한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고인돌이 있던 위치는 학익동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것이다.
이 고인돌의 발굴보고는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조사복명서(調査復命書)가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발굴된 3기의 고인돌은 모두 판석으로 석곽을 짜고 그 위에 개석을 올려 놓은 북방식이었으며, 그 속에서 무문토기 파편(그 당시에는 무문토기가 연구되지 않았던 때라 일본인 조사자들은 일본의 청동기시대 토기인 야요이식[彌生式]토기라 호칭), 석촉·석도(石刀)·지석 등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이 때 수습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지역의 고인돌은 원래 7기였으나 일제시 소년교도소를 짓는다고 6기는 없애버리고 1기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1년 소년교도소를 늘린다고 중구 송학동자유공원 내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90년 시립박물관이 연수구 옥련동 현 위치로 이전함에 따라 다시 옮겼다. 현재 학익동 일대는 시가지와 주택지가 되어 더 이상의 고인돌은 확인할 수 없는 형편이고 유물도 수습할 수 없었다.
다만 학익동 일대에는 연경산에서 흘러내린 바위가 풍부해 지금도 고인돌로 쓰임직한 거석(巨石)을 종종 볼 수 있어 고인돌 건립에는 편리한 장소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