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의 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높은 산줄기를 배경으로 분지의 한가운데로 뻗어내린 능선 위에 대형봉토분들이 밀집되어 분포하는 대표적인 가야지역의 고분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대형분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2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된 바 있는데 그 중 34호분(현재의 고분 호수로는 4호분)은 내부 매장주체부까지 노출되었으나 5호분(현재 25호분)은 봉토조사에 그쳤다. 그 후 오랜 동안 학계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다 1987년 이래 고분의 정밀한 분포조사와 봉분 측량이 이루어졌고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많은 유구들이 발굴조사되어 유적의 성격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 고분군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널무덤(木棺墓)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대형의 덧널무덤(木槨墓)으로 발전하고, 대체로 5세기경에는 세장방형(細長方形)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을 거쳐 고분군의 말기에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교체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말산리 · 도항리(末山里 · 道項里) 고분군에 분묘가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른 시기부터 시작된 가야지역의 고분군이 B.C. 1세기경이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이 고분군도 예외는 아니라고 추측된다.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는 모두 널무덤에 속하고 남북으로 긴 능선의 북쪽 가장자리에 분포한다. 널무덤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 길이 2m 남짓 되는 장방형의 평면에 깊이 1.5m 가량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장방형의 나무널(木棺)을 안치한 것으로, 이 시기의 보편적인 묘제라고 할 수 있다. 출토유물은 와질(瓦質)의 쇠뿔손잡이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長頸壺)와 승석문항아리(繩蓆文短頸壺), 독모양토기(甕形土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후의 묘제는 덧널무덤인데 널무덤의 규모가 대동소이한데 비해 덧널무덤 시기에는 소형묘와 대형묘로 나누어진다. 이들 덧널무덤들도 능선의 북편구릉지대에만 분포하는 것을 보면, 도항리 · 말산리 고분군은 능선의 북쪽 말단부나 그 부근의 평지로부터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능선으로 올라와 남쪽으로 향하여 축조되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 결과 아주 이른 시기의 대형덧널무덤(大形木槨墓)은 조사되지 않았다. 대개 4세기 후반이나 5세기초 정도에 해당되는 대형덧널무덤이 몇 기 발견되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말갑옷이 출토되어 유명한 마갑총이다.
마갑총(馬甲塚)은 함안(咸安)지역의 중심고분군(中心古墳群)인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이 입지한 주능선의 북쪽 말단부에서 발견된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이다. 아파트 건축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무덤구덩이(墓壙)의 규모는 길이, 너비, 깊이가 8.9×2.8×1.1m 정도되고 덧널(木槨)의 규모는 길이 6.0m, 너비 2.3m 정도로 추정된다. 덧널 바닥에는 잔자갈을 2∼3벌 깔았고 특히 나무널(木棺)이 놓여진 자리는 몇 겹을 더 높게 깔아 놓았다. 나무널 좌우에는 말갑옷(馬甲)을 잘 펼쳐서 부장해 놓았고 피장자의 우측편에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놓여져 있었다. 아쉽게도 말갑옷은 일부가 공사로 인하여 훼손되었으나 전체의 2/3가 복원될 수 있었다. 소찰(小札)을 엮어 만든 일종의 비늘갑옷(札甲)인 셈인데 소찰의 크기에 따라 몸통을 감싼 것으로 보이는 11.0×6.5㎝의 대형소찰(大形小札)과 목 가까이나 어깨를 보호한 것으로 보이는 7.0×3.5㎝의 소형소찰(小形小札)로 구성되어 있고, 목 부분을 가리는 것에는 종장판(縱長板)의 모양으로 된 것도 있다. 경주 황남동(皇南洞) 109호 3·4곽을 비롯하여 부산 복천동(福泉洞) 고분군이나 합천 옥전(玉田) 고분군에서도 말갑옷과 말투구(馬胄)가 출토되었지만 아직 실물자료로서 말갑옷 전체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고리자루큰칼은 고리부(素環頭部)에 어린문(魚鱗文)을 타출장식(打出裝飾)한 은판(銀板)으로 감싼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은장식고리자루큰칼(銀裝環頭大刀)이다. 머리맡에서는 날씬한 다리(臺脚部)에 화염문(火焰文)과 장삼각형의 투창이 뚫린 함안지역양식의 굽다리접시(高杯)와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등이 출토되었다. 5세기대 함안양식으로 정형화되기 전 단계의 기종구성과 기형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고분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덧널무덤 다음으로 이 고분군에서 성행한 묘제는 구덩식돌덧널무덤이다. 대체로 5세기경부터 구덩식돌덧널무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부터 거대한 봉토(封土)를 판축하여 쌓아올린 대형고총이 축조된다. 도항리 · 말산리 고분군의 주능선과 이로부터 갈라져 나간 지맥들의 정상부를 따라 자리잡은 대형고총(大型高塚)들의 대부분이 구덩식돌덧널을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함안 34호분과 1994년도에 발굴된 5·8호분은 모두 이 고분군에서도 최대형분에 속하는 것으로 구덩식돌덧널무덤들이다. 돌덧널의 규모는 함안 34호분의 길이, 너비가 10×1.7m이고 8호분이 11×1.8m되는 세장방형에 깊이는 모두 2m 정도 된다. 이 두 고분에서는 갑옷과 투구 장식이 있는 큰칼과 금동으로 장식된 마구류가 발견되었고 많은 양의 전형적인 함안식토기(咸安式土器)들이 출토되었다. 함안의 중심고분군인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의 대형 구덩식돌덧널에는 벽감(壁龕)과 같은 시설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굴계(橫穴系) 매장시설이 그대로 유입되지는 않았어도 구덩식 단계에 어떤 교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른 모든 가야지역에서처럼 일정시기부터는 함안분지 내에도 굴식돌방무덤으로 매장주체부의 형식이 바뀐다.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에 굴식돌방무덤이 출현하는 것은 6세기 중엽에 가까운 시기라고 추측된다. 1992년에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서 발굴한 4·5호 굴식돌방무덤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돌방(石室)의 평면형은 선대 구덩식과 같이 장방형을 취하고 축조방법도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널길(羨道)을 단벽 중앙에 마련하고 관받침(棺臺)을 낮게 설치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진주(晋州) 수정봉 2·3호분의 예와 유사한 점이 있다. 대개 이러한 굴식돌방무덤은 서남부 가야지역의 공통적인 양상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이 지역의 대형 굴계 매장주체부의 출현시기와 계기에 공통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한다. 이 시기부터 이른바 대가야(大伽耶) 계통의 토기양식들이 일정한 비율로 섞이고 종래의 함안양식의 토기들도 기종구성(器種構成)이 축소되면서 기형(器形)이 퇴화되는 등 부장유물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은 아주 근거리에 위치한 신음리(新音里) 고분군, 가야리(伽耶里) 고분군과 함께 안야국(安邪國) 혹은 아라가야(阿羅伽耶)의 지배자 집단의 공동묘지이다. 함안분지 내에서 최대형의 고총이 능선상에 나란히 입지하고 있어 봉분 직경이 30m 이상인 것이 3기, 20m 이상인 것이 13기, 10m가 넘는 것이 30기 가량 분포한다. 1990년대 들어서 활발해진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대체로 5세기대에 들어서면 다른 신라 · 가야지역의 수장묘군(首長墓群)에서는 신분을 상징하는 각종 금공장신구류와 함께 금관(金冠) 혹은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되는 것이 상례인데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유물이 극소한 편이고, 특히 관모류(冠帽類)나 신발류(飾履類)들은 일체 발견된 사실이 없다. 물론 이 고분군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많은 도굴을 당하여 그런 귀중품들이 이미 반출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볼 수 있지만 전혀 도굴된 흔적이 없는 함안 34호분에서도 그러한 금공품은 보고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도굴된 유구 내에서도 파편조차 확인되지 않았으며 현존 자료 중 함안 출토로 전하는 유물도 없다. 함안 아라가야의 왕급 묘에서는 누금(累金) 혹은 상감(象嵌)기법으로 장식된 고리자루큰칼류가 금공품을 대신하고 있으며 늦은 시기까지 갑옷류(甲胄類)가 많이 부장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순장(殉葬)의 방법이나 매장주체부의 형식도 아라가야 왕급 묘의 특징이 있다. 장방형이나 세장방형의 구덩식돌덧널을 전성기 왕급 묘의 매장주체부로 채택한다는 점은 다른 가야지역의 중심고분군과 공통되는 점이다. 그러나 아라가야의 왕급 묘에는 주부곽식(主副槨式)이나 여러덧널식(多槨式)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하나의 고총 봉토내에 하나의 돌덧널만을 설치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그리고 대가야의 중심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으뜸덧널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설치된 소형 덧널에 순장을 행하는데 비하여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에서는 하나의 돌덧널의 발치 쪽에서 여러 명의 순장 인골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