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단 ()

연극
단체
1911년 서울에 창단되었던 신파극단.
정의
1911년 서울에 창단되었던 신파극단.
설립목적

혁신단(革新團)은 연극활동을 통하여 권선징악·풍속개량·민지개발(民智開發)·진충갈력(盡忠竭力:있는 힘을 다해 충성함)에 힘쓰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이는 당시 성행하던 신소설의 주제와 비슷한 것으로, 이 시대 문화운동의 기층의식을 짐작하게 한다.

연원 및 변천

1911년 12월 김치경(金致景)의 재정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연극을 배우고 돌아온 임성구(任聖九)가 1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1911년 10월 남대문 밖 어성좌(御成座)에서 「불효천벌(不孝天罰)」외 1편으로 공연함으로써 창단되었다.

초기 단원은 단장 임성구를 비롯하여 한창렬(韓昌烈)·김순한(金順漢)·김운선(金雲善)·천한수(千漢洙)·장인환(張仁煥)·안석현(安錫鉉, 奭鉉)·김현(金顯:호는 小浪)·김영근(金永根:호는 陶山)·박창한(朴昌漢)·임인구(林仁九)·맹종상(孟鍾相)·황치삼(黃致三)·임운서(林雲瑞)·김기호(金基鎬)·고수철(高秀喆)·장희원(張熙元)·박용구(朴容九)·양성현(梁聖賢)·고병직(高炳稷) 등이었다. 창립공연은 그 기대와는 다르게 배우보다 관객 수가 적은 6~7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 극단의 전성기는 「쌍옥루(雙玉淚)」·「눈물」·「장한몽(長恨夢)」 등 가정비극을 상연하고 거둬들인 수익금으로 빈곤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던 1913∼1915년이었다. 이외에 이 극단은 「재봉춘(再逢春)」·「청춘(靑春)」·「우중행인(雨中行人)」·「봉선화(鳳仙花)」 등 일본 신파계에서 그 작품성이 검증된 작품들을 국내에서 번안·각색 공연하였다.

이 극단은 11년간의 공연을 통하여 몇 차례 그 연제경향을 바꾸어 나갔다. 초기의 공연은 군사극(軍事劇)·탐정극·실화극(實話劇)으로 공연하다가, 1913년 이후 정비극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소설연극이 주류를 이루는 가정비극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1910년대의 관객들에게 크게 공감을 주었던 이 가정비극은 신극의 확산이라는 긍정적인 면과 함께 ① 봉건적 인습의 수락과 결부된 체념적 태도의 만연, ② 민족의식을 좀먹는 일본문화의 유입과 같은 부정적인 성격도 강하게 드러냈다.

1910년대 극단들의 공연활동은 일정한 대본을 가지지 못한 ‘구치다테’〔口立:즉흥적인 대사〕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공연내용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공연 당시의 제목, 신문의 극평(劇評), 저본으로 사용하였던 신소설작품, 회고담 등을 통하여 그 흐름을 짐작할 뿐이다.

혁신단의 활동내용을 검토해보면, 군사극 계열에 작품으로는 「진중설(陣中雪)」·「청년입지고아소위(靑年立志孤兒少尉)」·「군인구투(軍人仇鬪)」·「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輝善捨子親罪)」·「충의신천리마(忠義新天理馬)」·「병사반죄(兵士反罪)」·「군인의 기질(軍人의 氣質)」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일본 신파의 군사극을 번안한 것으로, 청일전쟁·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커지고 있던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내용들이다.

군사극과 함께 인기를 얻었던 주제는 탐정극으로, 제2회 공연한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가 대표적이다. 신파극 중에 하나인 이 작품은 일본 신파극의 번안 작품이며, 여러 차례 재공연되었다. 이 밖에 「단총여도(短銃女盜)」·「형사고심(刑事苦心)」·「인신사기(人身詐欺)」·「여강도(女强盜)」·「우정독신정탐(友情獨身偵探)」 등도 있다.

이후에 제작된 실화극은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실자살해(實子殺害)」·「천도조정(天道照正)」·「친구의형살해(親仇義兄殺害)」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의의와 평가

혁신단의 연극은 신파극 초기의 미숙한 양상들을 극복하지는 못한 한계가 있으나, 이 극단은 아래와 같이 우리나라 연극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신극 최초의 본격적 극단으로 일본 신파극을 정착시킨 최초의 극단이라는 점이다. 1908년 원각사(圓覺社)에서 공연한 「은세계(銀世界)」가 연극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서구적 연극양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민영(柳敏榮)의 주장대로 ‘창극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혁신단은 우리나라에서 신파연극을 공연한 최초의 극단이 되는 것이다.

둘째, 1911년 창단에서 1921년 해단에 이르기까지 1910년대의 신파극 흥행을 대표하는 극단이었다는 점이다. 1910년대의 신파극단으로는 혁신단 이외에도 많은 극단이 명멸하였으나, 극단의 업적·형세로 보아 혁신단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혁신단은 우리나라 신파극의 보급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극단이 되는 셈인데, 그 기여는 연제의 개발을 통해서는 물론, 한국적인 서민감각을 살리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혁신단은 1910년대 신파극의 굵은 뿌리를 이루면서 두 개의 극단으로 분립하는데, 그 하나가 김영근이 이끈 신극좌(新劇座)이며 다른 하나가 김현이 이끈 취성좌(聚星座)이다. 그 뒤 1921년 임성구의 사망으로 해체되기까지 우리나라 신파극의 주도적인 극단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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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반세기』(강계식, 현대교육출판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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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사』(이두현, 보성문화사, 1979)
『연연세세』(박진, 경화출판사, 1966)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신극사이야기』(안종화, 진문사, 1955)
『조선연극사』(김재철, 학예사, 1939)
「1910년대 연극사 연구」(한갑수, 고려대학교 석사논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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