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하였고, 1919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협성학교·중동학교를 거쳐 192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이미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
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어 심리학·영어·한문·교육사를 가르치다 1930년 가을부터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고, 1931년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야학을 설치했다. 1932년 2월 사회과학연구그룹 사건으로 휴직했고,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3년 개천 및 영변 일대의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고, 1935년 경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이 무렵 재차 체포되어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파면되자 귀향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있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중 일부가 1945년 8월 평안남도에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결성할 때 최고책임자인 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로, 박헌영(朴憲永)의 정치노선을 따르는 한편, 민족주의 진영의 조만식(曺晩植)과도 제휴하고 있었다. 당시 진보적 지식인층과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신망이 두터워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지원하는 김일성보다 유력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이에 김일성과 소련군 정치사령부는 같은 해 9월 15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확대위원회에서 그의 정책과 노선에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적인 결정서가 채택된 지 2주일이 채 안 된 9월 28일 낮,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Romanenko, A.A.) 소장에게 들렀다가 트럭을 타고 돌아가던 중 평양시청 앞에서 괴한의 총격에 암살되었다. 그의 피살에 대해서는 소련군정사령부와 김일성이 사주했는데 설과 남한의 우익들이 저지른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