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신동아(新東亞)』에 발표되었으며, 단편집 『홍수전후』(1948)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그 무렵 호남 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을 때 가장 심한 손해를 입은 나주 영산포에 작가가 직접 현지답사를 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대대로 소작을 하는 주인공 송명칠은 농사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거룻배로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고 있는데, 해마다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팔자소관으로만 돌리고 체념하며 산다.
아들은 높은 곳에 집을 옮기자고 조르지만 모른 체하다가 30년 만의 대홍수를 당하여 영산강의 둑이 넘치고 온 들판과 전답이 물 속에 잠긴 채 거룻배로 피하려고 하였으나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만다.
거룻배와 집과 가축을 잃은 데다 열한 살짜리 딸마저 물결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모든 것을 일시에 잃어버린 주인공 송명칠은 수마(水魔)가 스쳐간 집터에서 죽은 딸이 생전에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수박과 참외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면서 아들의 말대로 이제는 높은 지대에 새 집터를 정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영산강 주변에는 대대로 소작을 하는 가난한 농사꾼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만들어 영산강 일대의 전답을 거의 차지하고 가혹한 소작 조건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 소작인들은 농사만으로는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현상보다도 더 불행한 현상을 들추어내고 있다.
즉, 주인공 송명칠을 통하여 이러한 조건과 가난을 천명으로 알고 아예 절대 굴종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적인 숙명관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하의 농민들의 참담한 생활을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력으로써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으며, 농민들의 패배적인 숙명관을 비판하고 강인한 의지력과 정신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