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호는 상아탑(象牙塔). 서울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폐허』, 1921년『장미촌』의 창단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조선시단』을 주재, 발행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때 교육계에 투신하여 국민대학 교수를 지낸 바 있다.
대학 재학시절에 일본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 문단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9년『매일신보』에 「시화(詩話)」(9월)·「조선시단의 발족점(發足點)과 자유시(自由詩)」(11월) 등의 평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오상순(吳相淳)·남궁 벽(南宮璧)·김억(金億)·변영로(卞榮魯) 등과 함께 『폐허』를 창간하여, 그 창간호에 「석양은 꺼지다」·「망모(亡母)의 영전(靈前)에 받드는 시(詩)」·「벽모(碧毛)의 묘(猫)」·「태양의 침몰」 등의 시 10편 및 상징주의 문학을 소개한 평론 「일본시단의 2대경향」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시작품들 중 「벽모의 묘」는 상징파 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초창기의 한국 근대시단의 기수로 자처하였으나, 우리말 사용 및 시어 선택은 매우 서투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품인 「태양의 침몰」은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어의 조야성(粗野性)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1929년에는 그의 유일한 시집인 『자연송』 및 무명의 여러 문학 청년들의 작품을 모은 『청년시인백인집』을 낸 바 있다. 시집 『자연송』은 제목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태양·달·별 등 천체나 꽃·이슬과 같은 자연물들을 주된 소재로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폐허’·‘장미촌’ 동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한때 그의 작품에 퇴폐적인 어휘가 많이 쓰인 것으로 인하여, 그를 세기말적 분위기에 싸인 ‘폐허’ 동인의 대표격으로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