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유학자 조식(曺植, 1501~1572)이 심성수양의 요체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조식의 『남명집(南冥集)』은 1604년(갑진)에 처음 판각되었는데 책판이 소실되어 1606년(병오)경에 다시 간행되었다.
1609년(기유) 병오본에 보유 1권을 추간하였고, 1622년(임술)에는 기유본에 유문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1671년(신해) 기존의 『남명집』에 『학기류편(學記類編)』을 합해 새 판으로 다시 간행하였으며, 1894년(갑오)부터 1897년(정유)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간행하였고, 1910년(경술)에 또 새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신명사도」는 1622년에 간행된 임술본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신명사도」를 풀이한 「신명사명(神明舍銘)」은 병오본(1606년)부터 보인다. 이를 보면 처음 문집을 간행할 때 「신명사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가 뒤에 수습하여 임술본을 간행할 때 보판(補板)으로 추각한 듯하다.
「신명사도」는 임술본(1622년) 이후 그대로 전해지다가, 갑오본(1894년)에 이르러 문자가 삭제되고 용어의 위치가 바뀌었다가, 경술본(1910년)에 이르러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신명사명」은 부주(附註) 15조가 첨부되어 있는 병오본(1606년)에 실린 것이 가장 상세하며, 기유본(1609년)에는 부주가 빠져 있고, 임술본(1622년)에는 소주(小註)가 거의 바뀌고 부주가 대부분 삭제되었다. 갑오본(1894년) 이후로는 소주와 부주가 거의 삭제되었다.
목판본. 1622년 간행된 임술본 권1의 「신명사명」 앞에 수록되어 있다. 책판의 반쪽 면에 실려 있는데, 반곽의 크기는 17.5×23㎝이다.
「신명사도」는 곽내·곽외·하단으로 되어 있다. 그 요지는 미발시의 경(敬)을 통한 존양(存養), 이발시의 의(義)를 척도로 하는 성찰(省察),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물리치는 극치(克治), 이렇게 삼단계 수양론을 통해 지선(至善)에 이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곽내는 인간의 신체를 의미하는데, 주재자인 태일군이 머무는 집이 신명사이다. 그의 정사는 천덕과 왕도이며, 사직과 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에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 5자를 표기하였다. 곽내는 조정의 일로 총재가 관장하는데, 경을 통한 존양이 근본이므로 그 이름을 ‘경(敬)’이라 했다.
곽외는 신체 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 이발시에는 마음의 기미를 잘 살펴야 하는데, 입·귀·눈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관문으로 표기하여 성찰을 강조했다. 그 담당자가 백규(百揆)이기 때문에 그 옆에 ‘치찰(致察)’이라 써 넣었다.
세 관문에는 대장기(大壯旂)가 펄럭이며 ‘심기(審幾)’라 표기해 놓았는데, 기미를 엄정하게 살피는 것을 말한다. 그 옆에 병기한 ‘극치(克治)’는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시 극복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대사구(大司寇)다.
하면은 경을 통해 존양하고, 의를 척도로 성찰하고, 사욕을 극복해 물리치고 나면 지선의 경지에 이르러 머문다는 뜻이다.
도학이 일어나던 시기에 심성수양의 요체를 도표화하여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을 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경(敬)·의(義) 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