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丹城)의 사인(士人) 이시분이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단성현의 각 지역을 설명한 사찬읍지이다. 당시의 다른 읍지들의 서술이 전국적인 규모의 지리지인『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따른 것과 비교하여 실험적인 기술방식에 따라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16∼17세기 읍지 편찬의 선구자인 한강(寒岡)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 이시분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변화된 단성 지역의 사회상과 지역상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인 단성의 읍지를 편찬하였다.
목활자본. 크기는 31×21㎝.『운창선생문집(雲牕先生文集)』은 3권 및 부록 2권, 합 2책으로 전하는데,『운창지』는 그 중 제1책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이시분을 제향한 칠원(漆原)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서 간행하였다. 내제는 단성지(丹城誌)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古 3428-694-v.1-2: M/F85-16-126-F).
읍지의 체재는 연혁고증(沿革考證), 산천고증(山川考證), 읍리고증(邑里考證) 그리고 총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혁고증에서는 강성군(江城郡)이 세종대에 단성현으로 강등되고 서산 아래로 읍치가 옮겨진 내역, 고을의 산수가 아름다워 중국 천태산의 단구와 적성 지역에 비유된 데서 군현의 이름이 연유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산천고증에는 유산, 내산, 둔철, 보암, 집현 등 다섯 개의 큰 산과, 신안강 및 그 지류를 소개해 단성의 자연지리를 알려 주고 있다.
내용의 대부분은 읍리 고증으로 되어 있다. 단성현은 넓이가 20여리에 불과한 작은 고장이지만 팔극(八極)이 있으므로, 팔괘의 상으로 팔방의 들을 구획해 여덟 개의 리〔八里〕로 정했으며, 팔리를 각각 8방(坊)으로 나누어 총 64방의 지역을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주역에 근거한 이시분의 유교적 사상이 지역 서술에 반영된 독특한 읍지 편찬 원칙이라 할 수 있다.
8리는 현내, 원당리, 북동, 법물예리, 신등, 도산, 오리, 생비량이다. 당시의 리는 조선 후기의 면이나 방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면리제(面里制)에서 보이는 리보다 넓은 지역이다. 이시분은 “리는 머문다라는 뜻이고, 백성이 거처하고 머무는 것”이라 표현하였다. 읍리 고증은 다른 읍지의「각리(各里)」,「면리」「방리」조에 해당하나, 각 지역에 과거 및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족가문의 내력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즉, 가문의 입향조(入鄕祖), 가계, 과환(科宦) 및 학문적 전통, 일화, 시문, 제문(祭文), 만사(輓詞) 등이 기재되어 있다. 특히 일반 읍지들이 항목을 나누어 나열식으로 기술하는 방식과 달리, 항목으로 구분하지 않고 인물과 관사, 산천, 역 등을 그 소거지와 소재지에 수록해 마을별로 지역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특징을 지닌다. 이는 지역의 역사를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연결시켜 보다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리 고증의 마지막 부분에서는『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비교해 단성 지역의 사정을 설명하였다.『동국여지승람』에 대나무가 단성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 등 토산물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향이나 비자가『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나타난 단성 지역의 문제점 등도 기록해 놓았다. 당시 단성의 토지 면적과 인구를 보면, 원장에 기록된 전답은 2,246결(結) 79부(負)인데, 실제는 1,876결 59부이다. 호수도 789호이나 실제 호수는 755호이며, 인구는 3,683명으로 남자 1,816명, 여자 1,872명이다. 아울러 역리(驛吏)·향리(鄕吏)·역고공(驛雇工)·공천(公賤)의 숫자도 쓰여 있다.
「운창지」는 17세기 전기에 편찬되어 현전하는 소수의 사찬읍지 중의 하나라는 점, 그리고 일반 읍지의 항목별 체재로 구성되지 않고 지역별 구성이라는 고유의 읍지 편찬 방식을 보여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한, 읍지가 읍치를 원할히 하기 위한 자료 모음이 아니라 각 지역의 역사를 담는 역사서여야 한다는 지리지 편찬의 의미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편찬 방식을 통해 조선 전기 및 중기의 단성 지역의 지역상, 사족의 이거(移居)와 사족집단의 형성과정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편찬 당시는 물론이고 1∼2세기 이전에 단성을 떠나거나 소멸된 사족까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파악하기 힘든 조선 전기의 사족의 이동과 분산 그리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향촌질서가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