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정조(正祖)가 제기한 『중용』의 의문(疑問)에 대해 올렸던 답변서를 이후 수정 보완하여 완성한 책으로, 『중용자잠(中庸自箴)』과 함께 『중용』에 대한 정약용의 독창적 해석이 잘 나타나 있다.
정약용은 22세 되던 178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진학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정조가 『중용』 가운데 의문나는 내용 70조목을 태학생들에게 내려주고 대답하게 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친구인 이벽(李壁)과 더불어 주어진 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상의하여 답을 작성하여 올렸다.
정약용이 올린 대답을 보고 정조는 “정약용이 누구냐? 그의 학문이 어떠냐? 다른 성균관 유생의 답은 대개 거친데 홀로 정약용의 대답만이 독특하다. 그는 반드시 학식이 있는 선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1793년 정약용은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서 자신의 대답이 견강부회하여 본지에 어긋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1814년에 갑진본(1784) 구고(舊稿)를 수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애초에 정조가 묻지 않은 문제 가운데도 중요한 것은 논의를 보태어 증보하여 모두 6권으로『중용강의보』를 완성하였다.
다산은『중용강의보』에서 중용(中庸)의 용(庸)을 평상(平常)이 아니라 항상(恒常)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천’을 인격적 상제로 해석하고, 성리학적 음양오행론과 인물성론을 비판하였으며, 성(性)이란 기호(嗜好)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중용강의보』에는 정약용의 초년기 사상의 특성과 『중용』 해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중년 이후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유학과 서학이 만나서 이루어진 창조적 경학 해석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