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수는 부친 황도연(黃道淵)과 함께 오늘날에도 임상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저술한 인물이다. 한의사이면서도 유학에 조예가 깊고, 게다가 출판업에도 종사했던 그가 전통적인 이단론에 의거하여 서학 및 양이(洋夷)를 배척하기 위해 저술한 서학(西學) 비판서이다.
1867년 송경원(宋景瑗)과 1870년 김기연(金耆淵)에게 각각 서문을 받고, 1876년 강난형(姜蘭馨, 1813~?)에게 발문을 받았다. 뒤에 족제(族弟)인 황지수(黃芝秀)가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추가하였으나,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필사본. 1책(24장).‘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라는 판심이 있는 용지에 필사한 것으로 보아 일제시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며, 중간 중간에 두주(頭註)와 교정한 흔적이 보여 미완성 원고로 판단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은 판심에 ‘척사설(斥邪說)’이 인쇄되어 있는 오사공란에 필사하였고, 서미(書眉)의 군데군데에 교정자의 것으로 보이는 두주가 주묵(朱墨)으로 필사되어 있고, 본문에 교정한 흔적도 확인된다. 고려대 도서관에도 동명의 책이 있으나 성격이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1867년 저자의 친구인 호산(壺山) 송경원의 「평비척사설서(評批斥邪說序)」와 1870년 김기연의 「척사설서(斥邪說序)」가 첫머리에 나오고, 이어서 본문이 나오는데, 황필수의 원문과 황지수의 주석을 문장단위로 나누고, 원문과 주석의 글씨 크기를 달리하여 편집하였다. 마지막에는 1876년에 쓴 강난형의 발문이 있다.
「평비척사설서」에서는 노불(老佛)조차 언급하지 않았던 도·학·교·법(道學敎法)을 태서인(泰西人)이 함부로 언급하는 것에 대해 이단으로 간주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하였고, 「척사설서」에서는 양이의 사설(邪說)이 양묵(楊墨)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또한 발문에서 태서학(泰西學)은 삼강오륜을 저버리고 제사를 폐지하여 보본(報本)의 뜻을 모르니 금수(禽獸)같은 존재라고 비판하였다.
본문에서는 천하에 사람이 귀하고 금수와 다른 까닭은, 화이(華夷)의 구별과 어질고 그렇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이적(夷狄)의 좋지 못한 것을 배운 자의 옳지 못한 일을 10가지로 나누어 비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상을 받들지 않으면서 효(孝)라고 하는 것‚ 십자가를 설치하고 인도(人道)를 버리는 것‚ 부모를 버리거나 소홀히 대접하는 것‚ 신기한 물건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 등이다.
저자는 1874년(고종 11)에 『달도집주대전(達道集註大全)』을 간행한 바 있는데, 본서와 동일한 문제의식에 따라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이른바 위정척사 의식의 마지막 단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저자가 유의(儒醫)로서 1885년(고종 22) 『방약합편』을 편찬하고, 1900년(광무 4)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을 중간하고, 이듬해 『신식유서필지(新式儒胥必知)』를 간행하는 등 왕성한 출판활동을 하였으므로, 그가 출간한 서적과 함께 근대적인 출판인의 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