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쓰여진 갑신완문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올 때, 산대극(山臺劇 : 가면극)을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각 도의 재인도청을 통합할 목적으로, 각 도 소임(所任)들이 서울에 모여 행방회(行房會)를 열고, 전국적인 규모로 기구를 재조직한다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호조에서는 판결을 받아 칙사영접에 쓰는 인장(印章)과 관련한 시행세칙을 만들었다. 이러한 세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자 1827년 다시 조정해달라는 소장(疏章)을 내게 되었는데, 이것이「팔도재인등장」이다.
「팔도재인등장」은 재인들이 칙사 영접 때 사용하는 인장과 관련하여 1824년(갑신년) 호조에서 만든 시행세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을 문제 삼아 소장을 제기한다는 내용이다. 공주(公州)의 공인이었던 박응선(朴膺善), 최성윤(崔聖潤), 박영대(朴英大), 박응철(朴膺喆) 등은 공의(公議)를 거친 것처럼 청양(靑陽)에 사는 소임(所任)송일문(宋日文)에게 통문(通文)을 보내어 그를 불러들인 뒤, 그가 가지고 있던 인장(印章)을 무단으로 빼앗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팔도의 재인들이 뜻을 모아 첫째, 사람을 속이고 물건을 빼앗아 가진 죄(罪)를 엄히 다스릴 것, 둘째 인장(印章)은 본청(本廳)에 올려 보내게 하여 돌려받게 해줄 것, 셋째, 앞으로 시행할 구체적인 내용을 먼저 급히 보고하도록 할 것 등의 세 가지를 엄중히 분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등장문 아래에는 소장을 올린 팔도의 재인 4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재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조선달, 최계광, 조판길, 고소득, 염계달, 송흥록, 김계철, 성대욱, 고원득, 이성록, 한종욱, 임○○, 김난득, 손작춘, 정사벽, 하복득, 임춘학, 조봉국, 고수관, 방칠룡, 홍원득, 공성주, 방한종, 방응국, 정윤대, 이현이, 이흥록, 박순엽, 유관득, 최영담, 황만빈, 하종문, 김판종, 염수량, 우대, 전치달, 박득관, 문신원, 조덕순, 조덕황
「팔도재인등장」은 1824년의 갑신완문과 더불어 판소리사 가운데 공문서로 표시된 유일한 방증(傍證)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 두 문서를 통해 재인 즉 광대가 칙사영접에 관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40인의 재인들 가운데에는 조선달,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김계철 등 판소리 창자로 알려진 광대들도 포함되어 있어 전국의 재인들이 칙사영접에 참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이후 산대극의 축소는 순조 이후 판소리의 융성으로 이어지는데, 이 문서는 그 구체적인 증거의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