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김선생종향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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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전기 학자 김인후의 문묘종사와 관련된 글을 채록한 언행록. 채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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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 학자 김인후의 문묘종사와 관련된 글을 채록한 언행록. 채록집.
개설

하서 김인후의 문묘종사는 1786년(정조 10)부터 호남 선비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다가 1796년(정조 20) 11월에 마침내 실현되었다. 본서는 1796년에 진행되었던 김인후의 문묘종사와 관련된 글을 채록한 것이다.

내용

1796년(정조 20) 10월에 성균관 장의(掌議)가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의 유생에게 보낸 통문(通文)이 실려 있는데, 김인후와 조헌, 김집의 문묘 배향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이어서 동년 8월, 경외의 유생 이규남(李奎南) 등이 세 인물의 문묘 배향을 요청한 상소와 이에 대한 정조(正祖)의 비답이 수록되었다. 정조는 비답에서 조선 성리학의 천명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김인후임을 강조하며 김인후를 의당 먼저 배향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한편 학유(學諭) 이의락(李義樂), 윤현대(尹顯大) 등은 세 인물의 문묘 배향을 요구하며 신문고를 치려는 과정에서 소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처벌에 관한 내용도 상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鐘秀)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과 주고받은 서간, 대사성 윤득부(尹得孚)가 좨주(祭酒) 송환기(宋煥箕)에게 보낸 서간, 송환기가 유림에게 답변한 글, 이조참의 이성보(李城輔)가 성균관 유생에게 답변한 글에서도 김인후 배향의 당위성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김인후는 문묘에 배향된 열여덟 명의 인물 가운데 유일한 호남 유림이다. 당시 노론측 유생들은 조헌과 김집의 종사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김인후만이 정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배향되었다. 조헌과 김집의 배향은 1883년(고종 20)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참고문헌

『하서김선생종향의(河西金先生從享議)』
『정조실록(正祖實錄)』
『하서집(河西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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