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년 겨울 사신 106명이 발해를 출발해 일본 장문국(長門國)에 도착했다가 이듬해 4월 귀국했다. 이 사신단 일행이 지참했던 문서의 사본이 「함화11년중대성첩사본(咸和十一年中臺省牒寫本)」이다.
함화(咸和) 11년(841) 윤9월 25일 발해의 정당성(政堂省) 춘부경(春部卿)인 하수겸(賀守謙)과 대내상(大內相)인 대건황(大虔晃: 훗날 발해의 제12대 왕)의 명의로 일본 태정관에 보내는 첩(牒)이 작성되었다. 이듬해 3월 28일 이 첩은 실제로 태정관에게 제출되었다. 후에 그 사본이 일본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에서 소장하고 있는『임생가문서(壬生家文書)』고왕래소식잡잡(古往來消息雜雜) 2권 중 제1권에 사본이 수록되었다. 1950년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발간된『도서료전적해제(圖書寮典籍解題)』역사편(歷史篇)에 사진이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로 29cm, 가로 48.8cm이며, 종이는 엷은 흑색의 숙지(宿紙)이다. 헤이안[平安]시대 말기에 필사(筆寫)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대성첩을 요약한 것이『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권11과『유취국사(類聚國史)』권194에 남아 있다.
서두에서 발해국 중대성이 일본국 태정관에게 보내는 글임이 명시되었다. 이어 사신의 대표인 사두(使頭: 대사) 하복연(賀福延) 외에 사사(嗣使: 부사), 판관(判官: 중요사무 처리 관직), 녹사(錄事: 문서·잡무 처리 관직), 역어(譯語: 통역관), 사생(史生: 문서담당 하급관리), 천문생(天文生: 항해시의 항로 선정과 기상 예측 담당자), 대수령(大首領: 말갈족(靺鞨族) 출신의 지방토착세력), 초공(梢工: 선원) 등 105명의 수행원을 파견함을 알렸다. 이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왕래가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고 예를 닦기 위한 것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발송 일자와 함께 발송 명의자가 하수겸·대건황임을 밝혔다.
이 문서는 발해와 일본 사이에 오고간 외교문서의 체제를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일본과의 외교관계뿐만 아니라 발해의 정당성이 외교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대성의 왕명출납 기능, 동궁제(東宮制)·수령제(首領制)·관제·지방행정제도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