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는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제반 사항을 수록한 영지(營誌)로, 채색지도(1장)를 비롯하여 「고 통제사 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 「충민사 중수기(忠愍祠重修記)」, 「재실 중수기(齋室重修記)」, 「충민사 중수상량문(忠愍祠重修上樑文)」으로 구성되었다. 정확한 편찬 경위와 발간 경위는 미상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본(古 9920-3)이 있다.
1책(49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며, 크기는 세로 39㎝ 가로 25.5㎝이다.
이 책은 「충민사」조에 있는 1847년(헌종 13)의 내용이 가장 마지막 기록인 것으로 보아, 『호우수영지』가 편찬된 1851년(철종 2) 전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장에 성내와 주변의 산수를 자세하게 그린 채색지도 1장이 수록되었다. 이어 건치(建置), 고적(古蹟), 충민사(忠愍祠), 성첩(城堞), 관원(官員), 민호(民戶), 천정(泉井), 막부(幕府), 중영(中營), 공해(公廨), 제영(題詠), 유방군읍(有防郡邑), 관하(管下), 사초(司哨), 노정(路程), 선창(船滄), 전선(戰船), 사례(事例), 제도(諸島) 등 19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600년(선조 33)에 이항복이 지은 「고통제사이공유사」‚ 1752년(영조 28)에 이백모가 찬한 「충민사중수기」, 1733년(영조 9)에 이명상이 쓴 「재실중수기」, 그리고 1750년(영조 26)에 지은 「충민사중수상량문」이 함께 수록되었다.
「고적」 조에는 도명의 유래‚ 도내에 있는 타루비(墮淚碑)와 충무공대첩비각(忠武公大捷碑閣)의 설립 경위를 기록한 남구만의 갈명(碣銘)을 소개하였다. 「충민사」에는 1601년(선조 34) 설립 경위와 이순신 등 배향 인물‚ 1773년(영조 49) 개비 내용 등이 적혀 있다. 「막부」에는 군관 287명의 내역과 소속된 각종 군·장인·원역 등 39종 2,043명의 내역을 적은 양역실총(良役實摠)‚ 「중영」에는 대솔군관(帶率軍官) 63명과 각종 군·장인·원역 등 30종 3,908명의 내역을 적은 양역실총이 수록되었다.
「공해」에는 진남관(鎭南館) 등 57종의 각종 건물의 규모, 창건 시기‚ 개건 시기, 개건 내용이 적혀 있고‚ 뒤에는 병고 등 25개 창고의 위치와 건물 규모‚ 창건 및 중수 내용 등을 수록한 「각고」가 기재되었다. 「제영」에는 진남관을 주제로 한 한준겸, 이덕형, 윤훤, 송영망, 한평석, 오숙, 이순신, 신익상, 유득일의 글이 수록되었다.
「유방군읍」에는 관하 38개 군현의 유방군 12‚855명의 내역‚ 「관하」에는 소속 수령, 찰방, 첨사, 별장, 만호의 내역과 1686년(숙종 12)·1690년(숙종 16)에 행해진 소속 진의 이속 관계 기록‚ 「사초」에는 좌사 중사 우사별 전·좌·중·우·후·초관 구성이 각각 수록되었다. 「노정」에는 주변의 진·군현·선소·도·감영·통영·병영·우수영·경도·면까지의 육로와 수로 거리가 적혀있고‚ 「선창」에는 선창의 규모와 연혁이 적혀있다.
「전선」에는 총 26척의 각 전선별로 전선의 소속‚ 크기와 규모‚ 건조시기, 승선 군병의 내역 등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또한 병선의 승선 인원‚ 전병선의 개조와 신조 규정‚ 선상단속군병에 관한 규정 등 각종 규례의 변천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았다. 「사례」에는 각 창고별 1년 소요물품‚ 수취하는 물목의 종류와 수량‚ 물품의 조달 방법 등을 수록하였다. 이 밖에 각종 납입 방물과 물건의 목록에 대한 내용. 전선·병선·사후선의 신조와 개조에 드는 비용‚ 조련시 비용‚ 소속 봉대‚ 소속 송전 등도 기록하였다.
이 책은 앞선 시기에 편찬된 전라좌수영 읍지인 『호남영지』(규 12189) 「전라좌수영영지급사례」에 비하여 그 내용이 더욱 상세하다.
19세기 전라좌수영의 운영 실태와 각종 전병선의 규모‚ 관리 규정, 각종 부세 관련 기록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조선후기 수군의 규모와 제반사항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해군사 등 관련 분야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