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던 신채호는 운동노선이 크게 다른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대통령에 선출되고, 자신이 발간했던 『신대한(新大韓)』이 임정의 대변지『독립신문』(주필 이광수) 발간으로 중단되는 등 임정 측과 충돌이 빚어지자 상하이를 떠났다.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긴 신채호는 인근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무장청년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당’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당’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교포청년의 지도에 열의가 높았던 신채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베이징에서 교포 학생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창립 당시의 임원진은 단장 신채호, 부단장 한진산(韓震山), 내무 겸 재무 조동진(趙東珍), 외무 문철(文哲) 등이었다.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외교노선과 준비노선이 구체적 실천력을 잃은 것이라 비판하고 무장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신채호의 무장독립운동노선은 1920년 4월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의 발기로 이어져 만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또 1921년 1월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 잡지로서『천고(天鼓)』를 창간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1921년 2월에는 “우리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