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하 독청)은 1945년 12월 21일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를 지지하는 43개 청년단체들을 망라하여 결성되었다. 상록회, 만주동지회, 건국청년회, 애국청년회, 국민당청년부, 불교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북한청년회, 정의청년회, 대동단결본부, 고려청년회, 조선청년회, 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광복청년회 등이 참가했다.
‘임정 봉대’를 내건 우익청년단체의 연합조직체인 독청은 한국민주당이 주축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의 산하 행동단체 성격을 띠면서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초대 임원은 총재 이승만(李承晩), 부총재 김구(金九), 위원장 전진한(錢鎭漢), 부위원장 이찬우(李燦雨), 백석기(白碩基), 유진산, 총무부장 한민홍(韓旻洪), 조직부장 한국동(韓國東), 선전부장 신균(申均), 청년부장 김구(金龜), 훈련부장 장두관(張斗瓘), 원호부장 이일청(李一靑), 지방부장 배창우(裵昌禹), 감찰부장 김윤근(金潤根), 무소속상집 홍윤옥(洪允玉) 등이었다.
독청은 1945년 12월 29일 ‘신탁관리배격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승인을 요구”하면서 “신탁통치배격운동에 참가치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영도 아래 독립정부수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소련이 미국측 안인 38도선 철폐를 거부하며 공산당에 의한 일당전제를 강요하고 있다”고 반공·반소투쟁을 주장했다.
독청은 대한노총 조직의 모체이기도 했다. 위원장 전진한은 독청 내에 노동부(부장 홍윤옥)를 신설하여 좌익적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타도하고 우익노동단체 조직에 착수했다. 이 결과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조직되었다. 1947년 4월 21일 귀국한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이 청년단체 통합운동을 벌이자 독청은 1947년 8월 7일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9월 21일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