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배구자는 구한말의 요화(妖花) 배정자(裵貞子)의 조카이며, 12세에 조선 공연에 온 쇼우교구사이덴까스(松旭齊天勝)의 덴까스곡예단(天勝曲藝團)에 입단하였다. 덴까스곡예단의 프로그램은 무용, 음악, 곡예, 연극, 가극이었고, 송욱제귀자(松旭齊龜子)라는 예명을 받을 정도로 기예가 성장했으나, 1926년에 평양 공연 후 경성으로 도망하였다.
홍순언(洪淳彦)과 결혼하였고, 1928년 장곡천정공회당에 올린 음악무용대회는 조선인 최초의 무용공연이었으며, 이때 발표한 「아리랑」이 큰 호응을 얻었다. 1929년 배구자예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단원들을 교육하였고, 1930년 배구자무용가극단일행은 일본의 흥행사를 통해 일본에서 활동했다. 조선춤의 무대화를 위해 「파계」, 「물깃는 처녀」, 「방아타령」 등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1년을 기점으로 악극이나 레뷰무대에 중심을 두었다.
1935년에 홍순언과 함께 회전무대와 호리존트를 갖춘 당시로는 최신식의 동양극장을 지었고, 전속극단 청춘좌, 희극좌, 동극좌, 호화선을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후반의 대중극을 일으켰다. 레파토리는 노래, 소규모 관현악, 레뷰춤, 가극, 만극 등 대중적 취향의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다 광복 후 일본에 정착하며, 전혀 활동하지 않았다. 말년에 하와이에서 거주했고 98세로 일생을 마쳤다. 배구자의 춤은 조카이며 배구자가극단의 단원이었던 배한라(裵漢拏, 1922∼1994)에 의해 하와이에서 전수되었고,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