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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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폭발사고
이리역폭발사고
현대사
사건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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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내용

1977년 11월 9일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화약열차는 10일 11시 31분에 다른 열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入換待期線)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주를 한 후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화물열차 속이 어둡자 논산역에서 구입했다는 양초에 불을 붙여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침낭 속에 몸을 묻고 잠에 빠져 들었는데 미쳐 끄지 않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폭발한 열차에는 당시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합계 1,250상자 30톤분이 실려 있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패였다. 역 구내에 있던 객차 · 화물열차 · 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다.

당시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가 집계한 열차 폭발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에 달한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다.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구성되어 재해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천막촌을 건설하여 이재민을 수용했고,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참고문헌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2(손정목, 한울, 2005)
『이리시사』(이리시사편찬위원회 편, 1989)
『총화의 기적-이리 재해 복구 백서-』(전라북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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