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이 있었고(방(坊)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말함),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이루어진 행정개혁 때는 대사동(大寺洞), 원동(園洞), 승동(承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있었다. 관인방과 대사동에서 가운데 글자 인(仁)과 사(寺)를 각각 따서 인사동이라는 동명이 붙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사동(댓절골)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인사동은 북쪽의 북악산과 남쪽의 청계천 사이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삼청동에서 시작해서 관훈동 · 인사동을 거쳐 청계천과 만나는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현재의 인사동 길은 이 개천을 따라 형성되었다. 인사동 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지며 700m의 비교적 좁은 길이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 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冊祿)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忠勳府)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풍기문란 등을 단속하던 이문(里門)이란 관청과 도화서(圖畵署)가 인사동에 있었다. 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다. 중인(中人)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율곡(李栗谷), 이완(李浣) 장군, 조광조(趙光祖) 등도 이곳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골동품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들 상점들은 국가유산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인사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들 수 있다. 당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해방 후 1970년대에 들어와 화랑, 표구점 등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이 이곳으로 집중되면서 인사동은 현재와 비슷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는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고 2002년 4월 24일에는 제1호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인사동은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의 거리이다. 여기에는 골동품 상점, 화랑, 표구방, 필방,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집중되어 있고, 전통찻집 · 전통주점 · 전통음식점이 번성하고 있다. 인사동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훨씬 더 많다. 법정동 인사동에는 종로1·2·3·4 행정동이 있는데 이들 4개 행정동의 2009년 인구는 4,437가구에 8,645명인데 비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하루에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외 관광객의 보행 편의와 원활한 문화행사 개최를 위해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인사동 거리를 ‘차 없는 거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