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후 두드리거나 눌러서 표면에 동전무늬[錢文]를 표현한 도자기가 사용된다. 주로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동오(東吳)-서진(西晉)-동진(東晉)대에 해당되는 것들이 많다. 한반도에서는 서울 몽촌토성 발굴과정에서 최초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이후 서울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 등 백제유적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그릇의 표면에 동전무늬를 표현한 용기는 대부분 도기이지만 간혹 유약이 발라진 자기 표면에 전문이 남겨진 것들도 있다. 내부에서 동전꾸러미가 나오는 일이 잦기 때문에 표면의 동전무늬가 동전 은닉이란 용도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후한대 이후 귀족들 사이에서 배금주의가 팽배하게 되면서 동전무늬는 전돌, 기와, 용기에 걸쳐 널리 새겨졌다. 전문도기가 크게 유행하게 되는 것도 이런 풍조와 관련이 있다. 한성기 백제 왕성과 지방의 중요 생활유적이나 무덤에서 전문도기가 출토되는 현상은 3세기 후반 이후 백제가 서진·동진과 활발한 교섭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주요 출토지는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 등을 들 수 있다. 공주 수촌리고분,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해남 용두리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시유도기도 전문도기로 추정된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196호 유구는 길이 10.8m, 폭 5.8m에 이르는 장방형의 구덩이인데 내부에서 4점의 전문도기를 비롯하여 33점에 이르는 중국제 시유도기가 다량의 백제토기 대옹, 대호와 발견된 바 있다. 이 유구의 성격은 왕실 식료창고, 연대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한성기 후반-웅진기에 걸쳐 전문도기의 수입과 사용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도기는 그릇 높이가 50㎝를 넘을 정도로 큰 용량에 넓은 구연, 팽창한 몸통, 안정된 저부를 지닌 것들이 많다. 동전을 비롯한 물품을 넣는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표면에 유약이 발라진 것도 많지만 도기로 분류하는 까닭은 소성 온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기벽이 성기고 푸석거리기 때문이다. 외면의 경우 동체 아랫부분까지 유약이 발라진 것이 많은데 유약을 부은 듯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모습을 보인다. 반면 내부는 동체 중간 정도까지 귀알같은 도구로 바른 흔적을 보인다. 유약의 색은 짙은 간장색이 많다.
전문의 종류는 대천오십(大泉五十)과 오수(五銖)가 주류를 이루는데, 실제 동전무늬를 충실히 모방한 것도 있지만 아주 형식적으로 표현한 것들도 많다. 동오대에는 어깨부위에서 동체 중간 정도까지 여러 단에 걸쳐 전문이 표현되지만 동진 이후에는 어깨부위에만 3∼4단 정도 표현되는 것들이 증가한다.
백제유적에서 발견된 중국제 전문도기는 3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 육조(六朝) 사이에 전개된 활발한 교섭의 산물이다. 전문도기의 전체적인 형태와 전문의 종류가 시간에 따라 바뀌는 사실을 고려하면 백제유적에서 발견되는 전문도기는 함께 출토되는 백제 유물의 연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울러 중국에서 전문도기에 내포되어 있던 사상[錢神論]이 백제 귀족 사이에 유입되어 있었는지도 해결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