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전기까지 사용되었던 노천요(露天窯)에 이어서 원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작기술과 함께 전래되어 재래의 노천요와 융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가마 형태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노천요에서 밀폐요(密閉窯)로 변화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밀폐요에는 움집과 같은 토기 소성실이 있는 실요(室窯)와 산비탈 경사면에 비스듬히 경사져 올라가는 터널형의 등요(登窯)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등요 형태만 나타나, 이후 삼국 및 통일신라,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간씩의 구조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연질토기·와질토기·경질토기·도기·자기·옹기를 굽는 가마의 기본 구조로 정착하였다.
밀폐요 중 실요는 이미 중국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은대(殷代)에는 석기질(도기)를 생산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한대(漢代)에 이르면 등요가 보급되는데, 우리나라 원삼국시대 전기에 나타나는 등요는 중국 한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작기술과 함께 전래된 새로운 토기 가마로 파악되고 있다. 등요는 통풍을 조절하여 실내의 온도를 1000도 이상 올릴 수 있고, 소성 후 요의 폐쇄에 의하여 공기의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환원염으로 구워낼 수 있다. 원삼국시대의 회색 또는 회흑색의 연질 또는 와질토기, 삼국·통일신라시대의 경질토기·기와, 고려·조선시대의 도기·자기·기와는 이와 같은 밀폐가마 구조인 등요에서 생산되었다.
우리나라 원삼국시대부터 사용된 밀폐요는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화를 거치지만 기본적으로 등요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 등요는 산비탈의 경사면에 터널형의 굴을 비스듬히 판 뒤, 벽면과 바닥에 점토를 짓이겨 바른 지하식 굴가마였다. 이 가마는 연소실과 소성실이 일체인 것과 턱이 져서 구분되는 것, 소성실 바닥의 경사도가 완만한 것, 급한 것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토기·기와를 생산하던 등요와 달리 고려시대 중기에 들어와 도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가마의 길이가 크게 확대되고 소성실 내부에 여러 개의 칸막이가 설치되는 등 가마구조와 규모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러나 소성실 바닥은 경사 바닥에 도지미와 갑발을 이용하여 소성할 도기·도자기를 적재하였다. 이러한 가마 구조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 소성실이 계단식의 칸을 갖춘 구조로 변화하였다.
고대사회의 고고학 자료 중 가장 보편적이고, 생활과 밀접한 자료인 토기를 생산한 밀폐요의 출현과 발전은 고대국가의 요업 생산체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며, 그 여파로 큰 사회변화를 추동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국가별로 요의 대형화·정형화가 이루어지는 등 사회발전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발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침내 국가형성 단계에는 토기생산 전문 집단이 등장하고, 생산된 토기의 크고 작은 유통망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제·관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대두하였다. 이와 같이 각 지에서 발굴된 밀폐요 자료와 생산된 토기의 면밀한 비교 분석을 통하여 각 고대국가별, 지역별 토기생산과 유통체계, 각 지역 간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