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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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전경
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전경
과학기술
개념
성곽을 만드는 건축기술.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성곽을 만드는 건축기술.
개설

성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잦은 외침으로 인해 수많은 성을 쌓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신인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할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성을 쌓아왔다’고 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성곽의 수는 1,650개 이상이며, 만주에 있는 고구려의 성곽을 합친다면 그 수는 2천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성곽은 외침이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조상들의 의지가 담긴 자취들로 인공적인 구조물이지만, 다양한 축성기술이 발휘되었다.

연원 및 변천

기원전 4~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왕검성(王儉城)은 기록상 가장 앞서는 성곽으로서 만주 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 중국과는 다른 형식의 한국식 성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성은 자연히 산성의 발달에 기본을 형성한 것으로 다음 단계의 고구려의 성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구려의 성에 대해서 중국인이 말하듯이, 왕은 평시에 평지에 살지만, 위급하면 평상시 비축된 양식과 무기가 있는 산성에 들어갔다는 것이 이 시기의 양상이었다. 이후의 성곽은 양산조개더미[梁山貝塚]·마산성산조개더미[馬山城山貝塚]·경주월성(慶州月城)·대구달성(大邱達城) 등과 같이 넓은 평야와 천류(川流)를 낀 구릉 위에 축조되었으며, 지형 조건에 맞도록 구성되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주거지의 입지 조건과 같은 위치인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또 다른 형식은 이러한 구릉 위가 아니라, 천류(川流)를 낀 평지에 방형(方形)이나 이에 가깝거나 축조한 것이다. 이것들은 한군현(漢郡縣)의 영향으로 추측되는데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였다고 생각되는 대동강 남안(南岸)의 구두진(狗頭津) 토성리 토성, 대방군(帶方郡)의 치소였다고 생각되는 당토성(唐土城), 임진강 남안의 육계토성(六溪土城), 서울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몽촌토성(夢村土城), 청주 정북리토성(井北里土城) 등이 있다.

구릉 위에서는 높은 성벽이나 누대가 없이도 평야 지대를 내려다볼 수 있고 축성에 소요되는 공력도 덜 수 있는 데 반하여, 평지의 경우는 높은 망루와 축성에 따르는 많은 노동력과 배수 처리문제 등 기술적인 여건이 요구되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방어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고지대의 성이다. 따라서 평지의 성은 차츰 더 이상 축조되지 않은 듯하다.

구릉 위의 성은 방어면에서 더욱 발전하여 산 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평소의 정치·경제·문화 활동과 특히 교통상의 여건으로 말미암아 평지나 낮은 구릉을 포용하였다. 고구려식이라는 평지성과 산성은 이미 서력 기원 이전에 성립된 것이며, 남쪽 지역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에 대한 한산성(漢山城), 신라의 월성이나 금성(金城)에 대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그것으로 대략 3∼4세기까지는 이러한 산성입보(山城入保)가 한국의 전형적인 성곽제(城郭制)로 정착된 듯하다.

4~5세기에 고대 전제왕권국가의 성립에서 도성제(都城制)가 생겨나고, 이것이 통일신라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중요 도시에 응용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고대 왕도제(王都制)의 성립에서 몽고의 침입 이후 고려 말 화포(火砲)의 전래에 따른 축성물의 변화에 이르는 기간을 편의상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가 우리나라에있어서 성곽의 발생, 산성제의 발전과 정착기라면, 제2기는 도성제의 발전과 기각(掎角) 방어체제로서 산성·장성 등의 발전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도성제는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에서 볼 수 있는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형이 평양에서도 나타나, 평지성인 안학궁지, 또는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大城山城)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 뒤 장수왕대에 이르러 평양성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성(都城)의 내성·외성제는 백제에도 나타나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면서 웅진성도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다.

이 제도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나, 그 다음의 사비기(泗泌期)는 확실히 내성[扶蘇山城]과 나성[扶餘羅城]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다가 청산성(靑山城)과 청마산성(靑馬山城)과 같이 왕도를 보완하는 여러 개의 성이 있어서 왕도의 방어력에 커다란 진전을 보게 된다.

신라의 경우에는 약간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그 기본적 구상은 비슷하였다. 월성이나 금성이 왕이 머무는 내성이라면, 명활산성(明活山城)·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 등은 나성의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성·외성 관계는 지방에까지도 파급된 듯하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산성이 이중으로 되어 처음에는 산꼭대기나 산허리를 두른 산성이 바깥으로 연장되어 산의 아랫부분 혹은 거의 평지까지 에워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 증가하거나, 아예 산꼭대기 부근의 내곽(內郭)과 산 아래까지 포함하는 외곽(外郭)을 가지는 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도성제의 기본적인 내외성제와 산성의 변화는 7세기 말과 8세기에 이르러 오소경(五小京)이 설치됨에 따라 지방도시의 축성에도 응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오소경이었던 곳의 성곽 배치를 보면 그러하다. 먼저 중원경(中原京)의 경우, 현재의 충주시 중심부의 입지 조건이 북쪽으로 남한강을 두르고, 서쪽으로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과 남쪽이 산악으로 막힌 널따란 평야에 있다.

서원경(西原京)이던 청주도 북쪽과 서쪽는 천류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과 남쪽은 산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다 충주의 경우 탄금대토성과 충주읍성(忠州邑城)이 평지에 있고 충주산성(忠州山城, 일명 南山城)이나 대림산성(大林山城)과 같은 커다란 산성이 그 배후에 짝하여 있다. 청주도 정북리토성이나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배후에 우암산성(牛巖山城)과 상당산성(上黨山城)과 같은 대규모의 산성이 짝하여 있는 것이다.

낮은 구릉상의 읍성과 그 배후의 비교적 높은 산성이 짝하는 지방도시의 축성 구조는 물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초기 성읍국가적 영향이겠으나, 고구려식 산성입보의 방법이 남으로 확대되고 도읍의 기본적인 구성이 이루어진 다음 지방도시까지 거의 비슷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음을 문헌과 실제적인 조사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축성 계획은 평지성과 산성과의 기각방어 계획으로서, 이것은 산성과 산성이 산꼭대기를 이어가며 축성된 배치 관계에서도 나타나 30∼40리 거리를 조망할 수 있는 산성들이 몇 개씩 떼를 지어 지방마다 존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우선 도성인 개경(開京)의 그리 높지 않은 산허리에 왕성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 뒤에 둘레를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쌓은 나성이 생겨나게 된다. 고려의 도성도 결국은 삼국의 왕도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축성 구조와 비슷하고, 조선시대의 한양 도성도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전통적인 축성 구조의 연장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성·읍성·산성 이외에 이 시기에는 장성(長城)이 쌓여지고 있다.

장성 축조의 첫 기록으로는 백제가 북방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청목령(靑木嶺)에서 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 있다. 그 뒤 고구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 신라의 패강장성(浿江長城)·동북장성·관문성(關門城) 등이 축조되고, 고려에서는 다시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말까지의 장성은 국경 근처의 여러 진보(鎭堡)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전통은 세종 때의 압록강 및 두만강 방면의 행성(行城) 축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장성의 전통도 역시 후대에까지 이어지지만, 이른바 관성(關城)의 축조로 변화되어 요새지의 일부만 축성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 시기에서 특이한 축성은 발해의 도성(都城)이다. 즉, 한반도내와는 달리 중국식의 평지방형을 기본형으로 하는 도성을 축조한 것을 들 수 있다. 내성과 외성이 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내성과 외성의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朱雀大路, 혹은 南北大路)를 중심으로 대략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시기는 화약과 화포의 사용으로 축성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면서 연해안과 북쪽 변경 등 외민족의 침입이 잦던 지역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진 고려 말~조선 초기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축성은 먼저 연해 지방의 읍성 축조, 북쪽 경계의 신개척지에 대한 방어선 정비와 행성 및 진보의 축조, 연해지방 진보축성과 같은 3가지 커다란 국가적 축성 사업이 진행된다.

고려 말 대륙 방면에서의 외침으로 극도로 피폐한 많은 주민들은 다시 왜구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었다. 특히 왜구의 침입은 연해 지방을 공지화(空地化)하게 하여 개경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고려는 응급책으로 내지의 옛 성터로 백성을 피난시키고 개경에 내성을 쌓는 등의 조처를 취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해안의 읍성을 수축하였다.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한양 도성이 일차적으로 축조되고 동북면 지역의 영토 개척과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진보 축성에 이은 행성의 축조가 진행되면서, 한편으로는 하삼도(下三道)의 연해 읍성 축조도 병행하는 등 축성이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과 문종 때 매우 큰 규모로 전국에 걸쳐 축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국방의 목적을 위한 축성 이외에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사행로(使行路)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왜사로(倭使路)에 있는 지방도시는 외관상의 이유로 성의 수·개축(修改築)이 계속되었다. 화약병기가 소개되면서 산성의 비중뿐만 아니라, 읍성의 비중이 커지고, 평지에 가까운 낮은 지대의 축성으로 빚어지는 방어의 능률 저하를 막기 위하여 세종 때에는 부속시설로서 옹성(甕城:성문 앞을 원형으로 둘러쳐서 방어하는 작은 성)·해자(垓子:성곽의 둘레를 감싸는 도랑)·적대(敵臺:성문 양 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지키는 방형의 대)가 의무화되기도 하였다.

성종 때에는 연해 지방의 진보(鎭堡)마다 군량과 병기를 둘 성보(城堡)가 축조되었고, 해안방어계획도 일단 상륙한 외적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삼포왜란(三浦倭亂)과 같은 작은 규모의 적에게는 효과가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의 외적 상륙에는 무력(無力)하였다. 임진왜란에서 방어에 성공한 성이라고는 진주성과 몇몇의 산성들뿐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하면서 우리나라의 축성은 일대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중국성과 왜성에도 우수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축성 방법도 반성하게 되었다.

중국의 평지 네모꼴 성은 직선 성벽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성밖의 깊은 참호와 현안(懸眼:성벽 위에서 아래로 낸 홈)·치성(雉城: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여장(女墻: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 등 부대시설과 성벽 자체의 견고함이 우수하였다. 또한, 석축이나 벽돌로 안팎을 똑같이 채워 쌓은 겹축성벽, 성벽의 규형(圭形) 단면, 각종 화포를 설비하는 시설과 현안(懸眼)시설 등이 뛰어났다.

왜성의 경우, 지형은 고립된 산과 구릉을 이용하고, 벽을 겹겹이 쌓되 물매를 많이 두는 방법 등이 지적되었다. 축성의 재료도 벽돌이 응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축성에 이용한 각종 기구가 새로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성과 종합이 이루어진 위에 나타난 것이 수원성(水原城)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성은 조선 후기 축성 기법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새로운 성곽 축조였다.

내용

우리나라의 성곽은 평면구성이 중국의 방형(方形)이나 중세 서양의 별모양[星形]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복잡한 평면을 이룬다. 따라서 성곽은 여러 개의 계곡을 둘러싸고 설치되기도 하고, 산등성이의 구불거리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지형이 산지가 많으므로 이 산지를 그대로 이용하며, 축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도 부근의 산돌을 깨어 이용하거나, 돌이 없는 산은 흙을 깎아 성벽을 구성하였다. 한편, 적의 침입 때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통적인 전술 때문에 따로 부대시설을 갖추지 않고 적당한 지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옹성·치성·망루 등의 시설을 따로 축조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축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축성 재료는 돌이다. 중국의 성이 주로 판축(版築)의 토성으로 축조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성은 주로 내탁(內托)의 석성(石城)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연할석의 평평한 한쪽 면을 성벽의 바깥부분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뗄 때 생긴 부스러기를 넣으며, 다시 그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우는 내탁의 방법은 작업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성을 부수는 무기인 충차(衝車)가 산의 험한 지형을 올라오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산성의 축성 기술은 산비탈을 적절히 이용하되 자연적인 경사면을 더욱 경사지게 하여 성벽으로 이용하는 삭토법(削土法)이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들은 평지의 경우에는 물을 이용한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성의 경우는 규봉(窺峯:넘겨다 보는 산)을 피하여 위에서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하고 있다. 평지성의 경우는 대개 앞에는 물이 좌우에서 합쳐져 자연적 참호를 이루게 하고, 뒤에는 험준한 산에 의지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자연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사람의 힘을 가장 덜 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점에서 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대개 물을 이용한 천연 장벽을 가진 평지성은 배후의 산에 산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 상태는 이른바 기각(掎角:앞뒤에서 서로 호응하여 적을 몰아치는 것)의 형태를 이루는데, 이것이 더욱 큰 규모의 지역에 적용되면 산성들 사이에 기각지세(掎角之勢)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산성의 대부분은 이 기각지세에 해당하여 하나의 단위 성곽이 적의 공격 목표가 되면, 다른 성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곽의 구조상 특징은 부대시설을 배치하는 데 산의 능선을 최대로 활용한 점이다. 우선 수문과 성문을 계곡의 중앙과 그 좌우에 설치하여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S자형으로 굽이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그 반대로 암문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의 바로 아래 비탈진 부분을 이용하여 설치되어 있다. 치성은 산성의 경우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성벽이 곧게 뻗은 곳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되었으며 대부분 곡성을 이룬다.

옹성은 가파른 계곡 경사면일 경우 대부분 곡성으로 대치되며, 대지일 경우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망루는 가장 높은 정상부, 혹은 산등성이와 연결되는 각부(角部)에 위치한다. 성내의 가장 낮은 부분에는 연못이나 샘이 있으며, 대부분의 연못은 방형(方形) 혹은 원형으로 단을 두고 깊게 축조하여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장은 평사(平射)보다는 내려다보고 쏘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 높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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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민보집설(民堡輯說)』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성제고(城制考)』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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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경남의 왜성지』(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1)
『조선고적조사보고』(조선총독부 편, 1916∼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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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축성기법과 변천과정」(세종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삼국시대 성곽 연구」(이원근, 단국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80)
「한국성곽의 사적고찰」(차용걸, 충남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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