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나무 자루 끝에 날(槍身)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것으로, 예로부터 세계의 여러 곳에서 쓰여 왔다. 나무자루에는 수피(樹皮)·수피(獸皮)의 끈을 감거나 수액(樹液)을 발라서 보강하고 장식하는 예가 많고, 또한 채색·조각으로 정교한 문양을 넣기도 한다. 창날은 흑요석·처트 등의 돌·뼈·뿔·대[竹]·금속을 재료로 하고, 그 형태는 다양하다. 그 모양에 따라 직창(直槍)·구창(鉤槍)·낫창[鎌]·삼지창(三枝槍) 등으로 나누지만, 끝이 뾰족한 유엽형(柳葉形)을 기본으로 한다. 창신은 자루 끝을 파서 삽입하거나 끈으로 묶어 수액·피치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죽창과 같이 대를 비스듬히 끊어서 그대로 사용하는 단순한 것도 있다.
선사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창은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창은 긴 나무자루의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이를 불에 구워서 강화시킨 것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나무자루 끝에 뿔이나 뼈, 돌로 만든 날을 달기 시작했으며, 신석기시대에는 깬돌과 간돌로 만든 보다 발전 형태의 석창이 등장한다.
사냥 도구가 아닌 전투용 창은 청동기시대부터 전장에서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각 시대의 전투방식에서 필요한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창이 만들어졌고, 같은 창이라도 시대에 따라 용도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창 유물을 보면 가장 흔한 창의 형태는 단순 직선형의 날이 달린 투겁창이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주로 투겁창을 사용하였으며, 이 밖에 기창(旗槍)이 의장용으로 사용되어 국가적 행사의 위엄을 과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창은 단창(短槍)이라고도 하는데 형태는 장창과 동일하나 길이는 장창의 절반 정도였다. 황색이나 홍색의 작은 깃발을 달아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특히『고려도경』에는 3만여 명에달하는 용호중맹군(龍虎中猛軍)이 각각 작은 창(矛)을 들고 창 위에 구름 문양이 그려진 흰색기를 달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창은 전투용과 의장용으로 구분되어 발달하였다. 의장용으로 사용된 창으로는 극과 기창이 있었고, 전투무기로서의 창에는 기병용의 기창과 보병용의 창이 있었다. 특히 창술을 무과 시험과목에 들어 있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창은 전투무기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장기간의 평화로 인해 점차 무기에 대한 관심을 떨어져 자루 길이도 짧아지게 되었고, 창술도 점차 퇴보하기에 이르렀다.
1587년 대마도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야스히로(橘康廣)가 조선군이 지닌 창을 보고 “너희들 가진 창이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창술은 어느 정도 유지한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선교사의 「1592년 일본 연례보고서」에 “꼬라이 병사들은 미늘창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사람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창술에 밀려 고전을 면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적과의 근접전에서 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실전에서 위력을 보였던 명나라의 낭선(狼筅)·기창(旗槍)·장창(長槍)·당파(鐺鈀)·죽장창(竹長槍)등을 도입되어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개량했고, 병사들의 창술 훈련도 체계화하여 무기체계에 변화를 꾀하였다. 이는 정조대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발간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화기가 보급되면서 단병무기는전반적으로 쇠퇴했고, 조선 후기의 창은 단지 의장용이나 포졸들의 무기로 전락했다.
2013년 현재 조선 후기의 정조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낭선·기창·장창·당파·죽장창 등의 단병무기와 무예기법들이 전통무예단체들을 통해서 수원화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 남산 팔각정 등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시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