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채색 필사본. 세로 272.7㎝, 가로 147.5㎝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도의 필사 수법, 표현 형식, 제작시기 등을 고려할 때 정상기가 그린『동국대전도(東國大全圖)』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평가된다.
정상기의『동국지도(東國地圖)』는 조선 후기 지도사(地圖史)에서 김정호의『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더불어 쌍벽을 이룰만한 지도로 평가된다. 정상기의『동국지도』는 대전도(大全圖)와 팔도분도(八道分圖)의 두 유형이 있는데, 현존하는 사본은 대부분 팔도분도류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174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상기의『동국지도』는 이후 계속 제작되고 수정·보완되면서 조선전도의 발달을 주도하였고, 결국『대동여지도』가 탄생될 수 있었던 모태가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동국대지도』는 표현기법이나 필체 등으로 볼 때 도화서의 화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족자의 형태로 배접되어 있는데, 지도의 위 좌측 모서리와 아래 우측 모서리에 ‘이왕가도서지인(李王家圖書之印)’이라는 커다란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도장은 일제가 궁중의 도서를 정리하면서 날인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제작시기는 지도의 내용으로 볼 때, 1755년∼1767년으로 추정된다.『동국대전도』원도의 제작시기를 1740년대로 추정한다면 원도의 제작시기와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동국대전도류 중에서는 가장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동국대지도』는 입자가 고운 비단에 화원의 솜씨로 보이는 정교한 필체로 그려져 있고, 원도에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중국의 만주, 일본 등도 묘사되어 있다. 만주는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졌으나 중국 동부 연안지역과 일본은 소략하다. 또한 현존하는 정상기의 팔도분도 사본들과 임의의 삼각점 거리를 계산하여 비교한 결과, 팔도분도와 동일 축척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볼 때,『동국대지도』는『영조실록』에 등장하는『동국대전도』로 1757년(영조 33)정상기의 아들 정항령(鄭恒齡)의 집에서 가져와 모사하여 홍문관에 비치했던 지도로 추정된다.
『동국대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수는 2,200여 개로 여타 대전도와 팔도분도의 지명수와 대동소이하다. 자연 지명에서는 산지의 지명이 압도적인데 특히 고개의 지명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고, 인문 지명에서는 진보(鎭堡), 산성 등 군사적 항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행정·군사적인 목적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형의 표현은 전통적인 산줄기 중심의 인식을 따르면서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방어선에 해당하는 여섯 개의 정맥(正脈)을 강조하여 부각시켰다.
인문적 요소의 표현 중에서 무엇보다 교통로의 표현이 상세하며 군사적으로 중용한 산성, 진보, 봉수(烽燧) 등도 보다 기호화된 형태로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아울러 변화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에 수록된 진보나 산성은 실제 이용되는 것을 중심으로 표시되어 있고, 도로의 경우도 제도의 규정을 따르기보다는 이용의 중요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그려졌다. 역원과 봉수는 다른 요소에 비해 불완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당시 이들 기능의 퇴화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태와 수록된 내용으로 볼 때 정상기의『동국지도』의 원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도이다. 정상기의『동국지도』는 백리척(百里尺)이라는 독창적인 축척이 사용된 지도이며, 조선 후기 대축척 전도의 효시에 해당한다. 또한 이전 시기 지도에서 보이는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을 수정하여 정확하게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해안선과 물줄기를 세밀하게 묘사한 최초의 지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