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사터는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원오리 사지, 상오리 사지, 정릉사지와 함께 고구려의 대표적인 사찰터이다. 금강사지는 1938년에 대지의 동쪽 밭에서 배수구를 파다가 고구려 기와층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현재의 배치를 알 수 있었다.
금강사터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강사는 498년(문자명왕 7년)에 창건되었다. 고려시기에 숙종은 금강사에 행차하여 반승(飯僧)을 베풀고 옛 탑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조에는 평양부 동북쪽 8리에 터가 있다고 전한다. 현재 평양 청암동에서 발견된 절터와 금강사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청암동 사지를 금강사터로 비정하는 것이다.
금강사는 도읍의 서남쪽에 대동강을 끼고 둘레 5㎞의 반월형으로 축조된 청암리성(淸岩里城) 안에 세워졌다.
금강사터는 앞, 뒤 건축군으로 나누어지며, 고구려의 가람배치 형식에 따라 1탑 3금당으로 배치되었다. 앞 건축군에는 남북중심축을 따라 문, 탑, 금당이 놓이고 탑 좌우에 전당이 각각 하나씩 배치되었다. 금강사의 중심건물은 다층 목탑으로 탑터의 평면은 8각형이며, 기단 한 변의 길이는 10.2~10.4m이다. 탑 둘레에는 70㎝ 너비로 둥근 돌을 돌려서 깔고, 탑에서 사방 건물들 사이에는 돌로 된 통로가 이어졌다. 8각목탑(금강사탑)은 층수도 많고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북한에서 7층탑으로 복원한 상태이다. 뒤 건축군에서 가운데 것은 강당터이다. 금강사터의 평면은 3각형, 4각형, 8각형, 원 등의 기하학적 도형들을 비례에 맞춰 이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금강사터 평면에는 1자가 35㎝ 안팎인 고구려자를 측도기준으로 하는 엄밀한 단위자 체계가 적용되었다. 금강사는 고구려의 독특한 가람배치(1탑 3금당형식)와 발전된 건축술을 보여주는 사찰유적이다.
금강사는 596년에 창건한 일본의 아스카사(飛鳥寺)와 가람배치가 같아 고구려 불교가 일본 불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북한의 국보급 제2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