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우왕 3)에 건립되었고, 공민왕릉 동쪽 봉명산(鳳鳴山) 광통보제선사터에 있다. 이 절은 공민왕비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던 사찰로, 원래 운암사(雲巖寺), 창화사(昌化寺), 보암사(光巖寺) 등으로 불리다가 공주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공민왕이 ‘영통보제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이색이 짓고 한수(韓修)가 쓴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빗돌은 공민왕이 중국에서 구해온 것이라고 전하며, 고려말의 조각기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문에는 공민왕과 왕비가 죽은 후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00여 칸이나 되는 웅장하고 화려한 광통보제선사를 1372년부터 1377년 가을까지 축조하였다는 것과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공사장에서는 부림소(일소)들이 힘에 겨워 수없이 죽어 넘어졌다는 등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무덤의 내력이 적혀 있으며, 공민왕과 왕비가 죽은 후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광통보제선사 및 이 비를 세우는데 관련이 있는 최영, 이색을 비롯한 문무고관들의 벼슬과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고려 말기의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줄 뿐 아니라 비문을 통하여 당시의 역사연구에 가치 있는 사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비는 기초석 위에 장방형의 기단석과 비신(碑身), 합각지붕의 비머리(螭首)로 되었는데 다른 비들과는 달리 비신 높이보다 너비가 훨씬 넓은 형태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비신은 회색 대리석이고 다른 부분들은 화강석으로 축조되었다. 비신의 하단은 일정한 높이로 한 면을 네 개 구간으로 분리하여 그 안에 꽃무늬장식을 하였다. 그리고 윗 테두리에 인동무늬띠를 돌리고 그 안에 비문을 새겼다. 비신 측면에는 선과 점선으로 용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머리는 비신의 위쪽 양모서리를 귀접이 하고 그 위에 맞물려 놓았다. 비석의 높이는 2.21m이다. 비석의 맨 밑에는 널직한 바닥돌을 깔았다. 그 한 변의 너비가 0.9m이다. 길이 2.09m, 높이 1.44m, 두께 0.38m의 비몸 앞뒤 면은 위, 아래로 구획을 나누고 무늬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