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룡사(法龍寺)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유존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절의 연혁은 조선시대 편찬된 지리지나 읍지 등에 일부 기록이 남아 있어 부족하나마 그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다. 법룡사에 관한 이른 시기의 기록은 1530년(중종25) 이행·윤은보 등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수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보인다. 이 책의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불우(佛宇)조에는 법룡사가 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참고하면 법룡사는 조선 전기 이전부터 창건되어 법등을 이어온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608년(선조41) 발간된 안동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도 법룡사가 등장한다.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 안동조에는 법룡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799년(정조23), 각 도에 흩어져 있는 사찰의 존폐여부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법룡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범우고』의 내용에 의하면 법룡사는 부(府)의 서쪽에 있으며 사찰에는 세 구의 석조불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법룡사는 승려들에 의해 1726(영조2)년경에 중수되었다(英宗丙午緇徒重修)”는 기록이 『범우고』에 전한다. 현재 법룡사에는 대웅전과 부속 건물 등이 남아 있는데 1950년 6·25전쟁 이후 모두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이다. 대웅전에는 근래에 조성된 석가모니불상과 협시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찰이 도심에 위치해 있어서 산신각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산신상을 대웅전 내에 봉안하였다. 사찰 측의 전언에 따르면, 6·25전쟁 이전 법룡사의 중심 건물은 중층이었으며 이 건물 안에 청동불입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