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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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동명왕릉 정면
평양 동명왕릉 정면
고대사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제1대 동명성왕의 능. 왕릉. 북한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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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제1대 동명성왕의 능. 왕릉. 북한문화재.
역사적 변천

이전부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능으로 전해왔으며, 1974년에 발굴 · 조사되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알려진 동명왕의 능에 대한 기록은 동명왕에 대한 숭배와 그에 따른 제의(祭儀)와 함께 전승되어 왔다. 동명왕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서 재위한 지 19년 만에 죽었고, 고구려 수도인 졸본의 용산(龍山)에다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동명왕의 사당인 동명묘(東明廟)도 졸본을 비롯하여 국내성과 평양성과 같은 도읍지와 요동성(遼東城)과 같은 전국의 주요 거점에 세워졌다. 또한 동명왕을 시조로 하는 백제에도 동명묘가 세워졌다. 그런데 졸본에 있어야 할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에 있다는 설이 생겨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동명왕의 무덤은 평양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이 생긴 것은 고구려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상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더구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고구려의 건국지를 평양으로 보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에는 동명왕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으려 하였고, 동명왕을 용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토대로 평양의 용산에 동명왕 무덤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동명왕의 무덤이 압록강 유역의 졸본이 아니라 평양에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이러한 인식은 조선의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는 평양에 동명왕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 정설화 되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동명왕 무덤의 수축과 관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더불어 동명왕 사당을 유지하고 치제(致祭)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로는 국왕이 직접 제수비용을 내리기도 하였고 직접 거둥하여 치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국왕의 관심은 조선시대 내내 동명왕 무덤과 사당에 대한 중수(重修)를 하도록 하였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봄 ·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고종 때에는 동명왕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부르고, 대대적인 개수공역(改修工役)을 시행하고 사당도 정비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도 이와 같은 경향은 이어져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동명왕릉에 대한 중수를 지시하였다. 1917년에 있었던 동명왕릉에 대한 중수는 동명왕릉의 소재지 중화군수(中和郡守)와 평안남도 장관과 조선총독까지도 직접 참여한 공역이었다. 이와 같은 동명왕릉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는 동명왕릉 위치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최근에는 1974년 북한 당국이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1994년에는 대대적인 개건(改建)을 하여 고구려 시조왕릉으로 성역화하는 작업을 마쳤다.

내용

구체적인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면,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돌기단 흙무덤으로 되어 있다. 기단돌의 높이는 150㎝이고, 그 밑의 기초돌 높이는 15㎝, 그리고 현재 남은 봉토의 높이는 650㎝로 총 높이는 815㎝이다. 그러나 원래는 기단도 2단 이상이고 봉토 또한 1m 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돌과 기초돌은 대부분 커다란 석회암을 다듬은 것이다. 네 모서리의 돌이 크며 그 중에서도 서북쪽 모서리의 기초돌과 기단돌이 가장 크다(기초돌 231㎝×220㎝×90㎝, 기단돌 433㎝×203㎝×65㎝). 봉토는 밑부분은 막돌과 모래흙을 섞었고 윗부분은 붉은 진흙으로 다져 쌓았다.

이와 같이 이 무덤은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무지무덤과 봉토돌방무덤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돌무지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바뀌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는 묘역시설이 있어, 첫 기단돌의 높이와 같은 지면에 사방 약 5m의 너비로 크기와 모양이 고른 강자갈을 가지런히 깔아 놓았다.

내부구조는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서 널길〔羨道〕 · 앞방〔前室〕 · 널방〔主室〕의 세 부분으로 축조된 돌방이다. 무덤은 9°가량 서쪽으로 기운 남향으로, 북쪽에 동서 421㎝, 남북 418㎝, 높이 388㎝의 널방이 있고, 그 앞에 길이 300㎝, 너비 169㎝, 높이 187㎝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앞방이 있다. 앞방 중앙에는 길이 235㎝ 정도의 널길이 달려 있다.

각 방의 사이에는 돌문을 달았다. 널방과 앞방 사이의 것은 높이 186㎝, 너비 85㎝, 두께 14㎝ 크기의 두 쪽으로 되어 있으며, 이마돌은 길이 435㎝, 너비 145㎝, 두께 55㎝나 된다.

앞방은 바닥에 큰 돌을 깔았는데 널방보다는 4㎝ 낮다. 벽은 150㎝×60㎝ 정도 크기의 다듬은 돌을 2단, 3단으로 쌓았다. 동서 양쪽벽 밑부분의 바닥과 같은 높이에 감(龕)이 있다.

널방은 정방형 평면에 꺾임천장구조로 44개의 석재로 쌓고 그 사이는 석회로 메꾸었다. 벽체는 2단으로 쌓았다. 밑단의 돌이 길이 416∼425㎝, 높이 182∼188㎝로 매우 커서 벽 하나가 1장의 돌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네 벽은 안으로 5, 6°정도 경사지게 쌓았다.

바닥에는 두께 17㎝와 25㎝ 되는 2장의 큰 화강암판돌을 깔았다. 그 밑에는 105㎝ 깊이까지 5층으로 삼화토와 숯층을 엇바꾸어 쌓아 배수장치를 하였다. 천장은 5계단으로 돌을 쌓아 올리고, 꼭대기를 큰 판돌로 덮었다. 천장의 경사도는 대체로 30∼40°이다.

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동쪽 벽의 일부와 천장을 근거로 생각할 때, 널방에는 고구려 벽화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풍속화나 사신도가 아닌 직경 12㎝의 연화문(蓮花文)을 벽면과 천장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4.2㎝)으로 약 640개(추정 복원) 정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남은 것은 여러 개의 금 또는 금동수식, 금관못 · 은관못을 비롯한 꽃무늬금동장식품과 머리핀 등이 있다.

기타사항으로 이 고분의 앞뒤에는 얼마간 떨어져서 딸린무덤〔陪塚〕이 있으며, 특히 앞쪽 120m 되는 곳에서는 고구려시대의 절터(정릉사지)가 드러났다.

이상의 규모와 축조상의 특이점, 벽화의 내용 등을 근거로 북한 학계에서는 5세기 초반 장수왕의 평양천도 때 옮겨 만든 동명왕의 능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구려(高句麗) 동명왕릉(東明王陵)에 대한 인식변화(認識變化)와 동명왕릉중수기(東明王陵重修記)」(김영관, 『고구려연구(高句麗硏究)』제20집, 2005)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의 묘주(墓主) 비정(比定)」(조영현, 『과기고고연구(科技考古硏究)』제10호, 2004)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의 축조시기(築造時期)에 대하여」(조영현, 『계명사학(啓明史學)』제15호, 2004)
「북한(北韓)의 고구려 유적 발굴(高句麗 遺蹟 發掘)과 그 성과(成果)」(김희찬, 『고구려연구(高句麗硏究)』제12집, 2001)
「동명왕릉(東明王陵)의 ‘개건’과「고구려시조 동명성왕기적비」」(김락기, 『인하사학(仁荷史學)』7, 1999)
「새로 발굴정리한 고구려 동명왕릉」(『력사과학』1978년 4호)
「동명왕릉」(김일성종합대학,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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