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귀」는 친구의 별장을 찾은 작가 ‘그’와 폐병을 앓는 여자의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다룬 작품이다. 소설에서 음습하고 고요한 별장, 까마귀의 울음소리, 폐병에 걸린 여성의 죽음은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자의 비극적 운명을 대상화한 감각적 문체는 결국 그에게 여자의 죽음은 타인의 죽음임을 드러낸다.
늘 주2 문체를 고집하여 독자를 널리 갖지 못하는 그는 한 달에 이십 원 남짓한 하숙 생활도 어려워 궁여지책으로 친구네 별장을 빌려 겨울을 나기로 한다. 그곳에서 그는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기다렸다가 밤에는 남폿불을 밝혀 창작에 몰두한다. 어느 날 무서운 꿈을 꾸고 일어난 그는 연당 잔디밭 길을 산책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이튿날 오후, 그는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때다가 어제 본 그 여자와 만난다. 여자는 그가 작가임을 알아보고 자신이 그의 독자라며 인사를 건넨다. 그는 정자지기를 통해 여자가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와의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는 이 여인을 위로할 방법을 생각하고, 포의 슬픈 시 「레이벤」을 떠올리며 그녀의 애인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까마귀를 무서워하는 여자를 위해 까마귀를 잡아 그 뱃속에 여자가 두려워하는 부적이나 칼이나 푸른 불이 들어 있지 않음을 직접 확인시켜 줄 계획을 세운다. 그는 물푸레나무로 활을 만들어 까마귀를 잡는다. 그리고 그녀가 오면 까마귀를 해부해 보이려고 정자지기에게 죽은 까마귀를 나뭇가지에 걸게 한다. 그러나 달포가 지나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잡지사에 다녀오던 그는 개울 건너 넓은 마당에 검은 자동차와 금빛 영구차가 놓인 것을 본다. 그리고 자동차 안에 있는 그녀의 애인을 바라본다. 영구차가 고요히 떠나간 후, 눈은 함박눈이 되어 쏟아지기 시작하여 자동차들이 지나간 자리를 덮어 버린다. 이날 저녁에도 까마귀들은 여전히 까악까악, 까르르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