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염법(榷鹽法)은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권리를 국가 기관의 관리 하에 두고 그로부터의 수익을 수취하는 법이다.
각염법이 처음 출현한 시기는 기록의 결핍으로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충선왕(忠宣王) 때부터 실시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충선왕 이전에는 소금 생산자인 염호(鹽戶)로부터 매년 일정액의 염세(鹽稅)만을 징수하는 징세제가 행해졌는데, 충선왕 때에 와서 당시의 급박한 재정난을 해결하고 몽골과의 관계 이후 새로이 등장한 권세가(權勢家)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각염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권79, 식화(食貨)2, 염법(鹽法), 충렬왕(忠烈王) 24년 정월 조에 의하면 충선왕은 즉위한 후 천하의 공용인 염세를 특정 세력이 독점하여 그 세(稅)가 거둬지지 않아 국용(國用)이 부족해짐을 탓하며 해당 관청이 조사하여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어서 충선왕은 옛날의 각염법을 언급하며 궁원(宮院) · 사사(寺社)와 권세가에서 염분(鹽盆)으로부터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하여 이들이 가지고 있던 염분을 모두 관에 귀속시키도록 하였다. 소금을 사용하는 사람은 의염창(義鹽倉)에서 사도록 하고, 군현민(郡縣民)들은 관할 관청에서 포(布)를 내고 소금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현민을 뽑아서 염호로 삼도록 하였다.
각염법의 시행은 12~13세기에 이루어진 소금 생산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특히 12세기 이후 증대되고 있던 유민(流民)은 소금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대몽 전쟁(對蒙戰爭)을 전후해 해도(海島)를 중심으로 한 연해 지방에는 농토로부터 이탈된 농민들과 피난민들에 의해 새로운 소금 산지가 개발되고 있었다.
국가는 각염법의 시행으로 전국의 모든 염분을 국가에 소속시키고 군현민을 징발해 염호를 삼았으며, 민부(民部)로 하여금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게 하였다. 소금의 생산은 국가가 염호에게 일정한 자립성을 부여해 생산 과정을 맡기고, 지정한 공염액(貢鹽額)을 납입시켰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와 경비는 염호가 모두 부담하였다.
한편, 유통 부문에서는 국가가 염호가 속해 있는 연해 군현의 염창(鹽倉)에 공염(貢鹽)을 수집해, 일부는 당해 군현민에게 판매하고, 나머지는 소금이 생산되지 않는 경중(京中)과 내륙 군현으로 옮겨 판매하였다. 그 값은 2석(石)에 포 1필, 4석에 은(銀) 1냥으로서, 소금의 전매로부터 얻어진 세입은 포 4만 필이었다.
판매 방식은 연해 군현과 내륙 군현, 그리고 경중의 지역에 따라 각기 달랐는데, 어느 경우에나 국가에서 직접 판매를 담당하는 관매법(官賣法)으로서 민간 상인의 개업을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이처럼 유통 부문에 철저한 통제를 가했던 것은 소금의 생산지가 반도의 3면에 걸쳐 있어, 곳곳에서 소금이 생산되기 때문에 사염(私鹽)의 단속이 용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권세가의 세력이 강대해 민간에게 소금의 판매를 맡기는 통상법(通商法)을 행할 경우 그들에 의한 사염의 제조와 사거래(私去來)의 위험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각염법의 시행으로 소금 가격이 통제되고 그만큼 불법적 소금 유통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가격의 폭등도 예견되었다. 또한 불법적으로 염분을 소유하거나 매점매석의 가능성도 커져갔다. 또한 각염법의 시행을 둘러싼 논쟁과 시행 이후의 불법적 유통으로 인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각염법의 시행 이후 염분을 소유한 권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357년(공민왕 6) 9월에는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파견을 둘러싸고 이색(李穡), 전녹생(田祿生), 이보림(李寶林), 정추(鄭樞) 등이 그 폐단을 논하였다. 당시 지방에는 염장관(鹽場官)과 염철사(鹽鐵使)가 이미 파견되어 있었으며, 별감(別監)의 파견은 또 다른 징세를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각염법은 생산 부문에서 소금 공급의 부족과 유통 부문에서 관염관(管鹽官)들의 부정, 사염의 성행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노출되어 정상적인 시행을 보지 못하였다.
더욱이 철저한 전매제의 시행을 뒷받침할 만큼 국가 통제력이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행 뒤 얼마 되지 않아 권호(權豪)들에 의한 염분의 탈점(奪占) 현상이 나타나면서 소금의 공급이 더욱 부족하게 되었다.
한편 각염법 시행 이후에 소금의 유통 과정에서 염장관의 부정과 염포(鹽布)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염장관은 가포(價布)를 먼저 징수하고 소금을 백성들에게 지급하지 않는 부정을 하거나, 염포의 관리들이 사사로운 이익에 집착하여 일반민들에게 소금을 팔지 않는 사례도 나타났다.
특히 지방 관리들의 소금 생산 독촉과 수취 체제의 모순으로 인하여 염호가 유망하는 사례도 확산되었다. 특히 원간섭기에 왜구(倭寇)의 침구(侵寇)로 인하여 연해 지방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고 소금 생산을 담당하던 염호의 유망은 더욱 심화되었다. 각염법 시행 이후에 나타난 생산과 유통상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염세의 징수 방식이 포를 먼저 내고 소금을 받는 방식에서 소금을 먼저 지급하고 포를 받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소금의 구매 대가로 납부하던 염가포(鹽價布)가 새로운 조세 항목으로 변화되어 백성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각염법은 소금의 전매를 통한 국가 재원의 확보보다 그와는 무관한 염세라는 명목의 새로운 세원(稅源)의 신설을 통한 재정 확보를 꾀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 확보라는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각염법이라는 명목 자체는 폐지되지 않고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