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원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차도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이칭
이칭
강수(姜洙), 강사원(姜士元), 강방준(姜方俊)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894년(고종 31)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영덕
관련 사건
청주전투
정의
개항기 때, 차도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강수(姜洙)·강사원(姜士元)·강방준(姜方俊). 강시원은 동학 입도 후인 1875년 10월,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개명한 이름이다. 영덕 출신. 강정(姜錠)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3년경 입도하여 최제우(崔濟愚)의 지도를 받았다. 1864년 3월 최제우 순도(殉道) 후에는 최시형을 도와 흩어진 교인을 모으고 약화된 교세를 신장시켜 교문(敎門)을 조직화하였다.

1871년 3월에 이필제(李弼濟)가 일으킨 영해 교조신원운동 때, 이 운동을 준비하고 무리를 지어 영해 관아에 쳐들어가 인부(印府)를 탈취하는 등 적극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시형·이필제 등과 단양으로 도피, 오랫동안 잠적생활을 하였다.

도피생활 중에 최시형과 의형제로 결속하여 최시형 중심의 교문 확립에 기여하였다. 또한, 영해신원운동 이후 최시형과 함께 동학의 각종 종교의식의 확립에도 참여하였다.

1872년 10월에는 교문의 제2인자격인 차도주(次道主)에 임명되었다. 1879년에는 교문 최초의 교단사인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를 집필, 이듬해에 간행하였다. 여기서 최시형을 도통의 전수자로 확정하여 교문의 정통성을 최시형에게 두었다.

1880년의 『동경대전(東經大全)』, 1881년의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경전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손천민(孫天民)이 1883년 이후 주로 최시형을 보좌하기 전까지 최시형의 법설이나 명령 등을 받아쓰는 구실을 담당해 동학 교리의 체계화에도 이바지하였다. 1885년에는 한때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893년 2월 서울 복합상소를 뒤에서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94년 9월에는 북접동학농민군을 인솔하여 동학운동에 참여했다가, 11월 청주전투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어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수운행록(水雲行錄)』
『교남공적(嶠南公蹟)』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
「본교역사(本敎歷史)」
「해월최시형의 초기행적과 사상」(박맹수, 『청계사학』 3, 1986)
집필자
박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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