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다.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산성의 경우 1234년(고종 21)부터 본격적으로 축조하였다. 약 1.2㎞ 규모로 토성(土城)을 축조하였는데,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몽골에 의해 헐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고종 20)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 초에 고려 때의 내성을 축소하여 석성(石城)을 축성하였으니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그러나 강화산성은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 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 등의 장대와 2개의 수문이 있었다.
1970년대 시행된 강화전적지 정화사업을 통하여 1975년에는 남문 안파루(晏波樓), 1977년에 서문 첨화루(瞻華樓)와 북문 진송루(鎭松樓) 등을 복원하였고, 2003년에 동문 망한루(望漢樓)를 복원하였다.
강화산성에는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동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2000년대 들어 강화산성에 대한 학술연구조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강화산성 지표조사, 동문지 주변 지표조사, 남장대지 발굴조사, 북장대지 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져 강화산성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상당 부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강화산성의 초축 규모와 위치 등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비록 국난을 피하여 천도를 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국난 극복의 의지가 담긴 현장으로 의미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선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