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외성(江華 外城)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성으로, 강화군 동해안(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에 걸쳐 있다.
고려는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 외성의 경우, 1233년(고종 20)부터 축조한 성으로 그 길이가 약 23㎞(적북돈대∼초지진)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개축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화 외성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1일에 지정 해제되고, 2003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4월 18일 강화 외성의 성곽과 진해루지(鎭海樓址)로 확인된 구역을 추가 지정하였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고종 24)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保障地)로 주목받으며 강화의 관방 시설이 수차례 정비되었다. 국난시에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어 1618년(광해군 10)에 보수된 바 있고, 병자호란(1636~1637)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쌓고 돈대를 설치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한 김시혁(金始爀)이 품계하여 벽돌을 이용하여 일부 구간을 다시 쌓았다. 특히 오두돈 남측에는 영조 때 유수 김시혁이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잔존하고 있어 주목된다.
강화 외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고, 조해루,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 안해루 등의 문루 6개소,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강화 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의 축성기법이 확인되는데, 성의 길이가 긴 까닭에 각 구역마다의 특성이 있다. 특히 오두돈 주변에 있는 전축성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다.
당시 도성의 구조 및 축성사 연구는 물론 고려 후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의 변화상 연구에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오두돈 주변(남측)의 전축성은 수원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