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성동 고분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무덤군.
이칭
이칭
경주 황성동 유적
유적/고인돌·고분·능묘
건립 시기
7세기 중반
관련 국가
신라|진한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07년 01월 02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황성동 906-5번지
내용 요약

경주 황성동 고분(慶州 隍城洞 古墳)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무덤군이다. 경주시 북서쪽에 자리한 형산강변 하상 충적 대지에 넓게 분포하는 대규모 무덤군으로, 원삼국시대 널무덤 단계부터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 단계까지 장기간 조영되었다. 신라 무덤의 계기적인 변천을 명확하게 보여 주며, 사로국 형성 과정과 신라의 발전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무덤군.
발굴경위 및 결과

경주 황성동 고분은 경주시 북서쪽에 자리한 형산강변에 접한 해발 30m 정도의 하상 충적 대지에 분포한다. 이곳은 남에서 북으로 그리고 동에서 서로 약하게 경사진 평탄 대지이며 기반층은 형산강변의 자갈 모래층이다.

고분군은 좁은 지역 안에 여러 시기의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특징을 보인다. 고분군 주변으로 신석기시대의 주1,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주거유적, 주조철부 제작과 관련된 제철유적, 통일신라시대의 도로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은 원삼국시대 주2 단계부터 통일신라시대 주3 단계까지 장기간 조영되었으며, 고분군에 인접하여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생활하던 주거유적과 이들이 경영한 제철유적이 확인된다. 고분 구역, 취락 구역, 생산 구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모습이며, 남서쪽이 취락 · 생산 구역이고 동북쪽이 고분 구역에 해당한다.

고분군의 발굴 조사는 1985년부터 시작되어 2015년까지 수차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고분이 조사된 지점은 경주시 황성동 583-2번지(1985년, 국립경주박물관), 513-3번지(1993년, 국립경주박물관), 545번지(1994년, 국립경주박물관 · 동국대학교 · 경주대학교), 601-2번지(1994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634-1번지 일대(199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884-8번지 일대(강변로유적, 2000~2001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881-1번지(2007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 575번지(2007년, 영남문화재연구원), 590번지(2007~2008 · 2015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의 약 11개소이며, 총 700여 기에 가까운 고분이 조사되었다.

고분군은 서기전 1세기 후반부터 7세기 대까지 오랜 기간 조영되었으며 신라 무덤의 계기적인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고분군의 규모에 비해 대형 주4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심 고분군인 경주월성로고분군에 비해 다소 급이 낮은 고분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주 황성동 고분군은 중심지 인근에 형성된 주변 고분군으로 중심 고분군과의 상호 관계성을 검토할 수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변천

고분군의 형성 과정에 관해 살펴보면, 고분은 취락 · 생산 구역의 남쪽과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884-8번지 일대의 강변로유적 도로 구간에서 가장 먼저 조영되기 시작한다. 이곳 일대에서 서기전 1세기 대의 널무덤 5기와 주5 1기가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여기서 군집을 달리하여 동북쪽으로 약 600m 떨어진 황성동 575번지와 590번지 북쪽을 중심으로 1~2세기 대의 널무덤이 축조된다. 3세기에 들어와서는 강변로유적 소방도로 구간에 대형 주6이 분포되기 시작하며, 덧널무덤은 고분군의 서쪽 경계 부분까지 확장된다.

바로 이어서 575번지와 590번지 일원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있던 널무덤과 혼재되어 덧널무덤이 본격적으로 조영되는데, 이때 덧널무덤은 군집을 이루는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에 경주식 덧널무덤인 주부곽식 세장방형 덧널무덤이 출현한다.

4세기 대에는 590번지 서남쪽에 고분이 조영되며 점차 주변으로 범위를 확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분군의 밀도가 높아진다. 5세기 대에는 590번지의 서쪽과 북쪽으로도 범위가 확장되어 전면적으로 고분군의 밀도가 증가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주7이 축조된다.

6세기 전반에는 고분의 확장은 관찰되지 않고 고분과 고분 사이의 공지에 추가로 조영되면서 밀도만 증가되는 모습을 보인다.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돌방무덤이 돌무지덧널무덤의 밀집 구역 동편에 축조되기 시작하면서 동쪽으로 고분군이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형태와 특징

고분군에서 조사된 무덤은 널무덤,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돌방무덤 등이다. 시기별로 고분군의 공간이 확장 또는 이동하는데, 이를 통해 고분군의 성장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널무덤은 서기전 1세기 대에는 884-8번지 일대의 강변로 도로구간에 분포하며, 판재를 사용한 널무덤으로 보강토에 강돌을 채웠다. 주머니모양토기, 짧은목항아리 등의 전기 와질토기류와 쇠검, 쇠창, 쇠도끼, 쇠낫, 판상쇠도끼 등의 철기류가 부장되었다.

입지를 달리하여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대에는 575번지 일대에 분포하는데, 판재식 널무덤으로 보강토에 모래와 사질점토, 강돌을 이용하였다. 널을 고정하기 위해 강돌을 괴기도 하였다. 전기 와질토기인 주머니모양토기, 쇠뿔모양손잡이항아리, 짧은목항아리를 비롯해 쇠화살촉, 쇠창, 쇠도끼, 쇠낫, 청동팔찌, 청동말모양허리띠장식, 청동칼집장식, 목걸이 등이 부장되었다.

덧널무덤은 평면 방형, 장방형, 세장방형으로 구분되며 딸린덧널의 유무에 따라 단독곽식과 주부곽식으로 분류된다. 주부곽식을 다시 이혈주부곽식과 동혈주부곽식으로 구분되며 세장방형 덧널무덤은 동혈주부곽식이다.

출현기인 3세기 전반에는 방형의 덧널무덤과 장방형의 소형 덧널무덤이 축조되지만, 이후 이혈주부곽식 장방형 덧널무덤과 동혈주부곽식 세장방형 덧널무덤, 병렬식 장방형 덧널무덤 등 다양하게 축조된다. 덧널무덤에는 굽다리뚜껑긴목항아리, 두귀달린항아리, 굽다리뚜껑항아리 등과 같은 후기 와질토기와 고식 도질토기 짧은목항아리가 부장되고 철제 마구와 쇠화살촉, 덩이쇠, 쇠창, 수정제 다면옥 등이 다수 부장된다.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은 주로 5~6세기 대에 축조되었다. 884-8번지 일대 강변로유적, 575번지, 590번지에서 집중적으로 조영되었는데, 덧널무덤과 인접하지만 묘역을 구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이혈주부곽식 덧널무덤이 사라지는 단계에 등장하며 딸린덧널의 유무에 따라 주부곽식과 단곽식으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덧널무덤 구조에 상부 돌무지라는 요소가 결합된 형태로 이해된다.

유물은 굽다리접시, 뚜껑,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 등 토기류가 주를 이루며 전형적인 신라양식 토기가 부장된다. 철기류는 토기류에 비해 소량 출토되는데, 큰칼, 쇠창, 쇠화살촉, 쇠낫, 쇠도끼, 재갈, 등자,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의 무기류와 공구류 및 마구류가 부장된다.

돌덧널무덤은 주로 강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바닥은 주검받침이 전면에 있는 것과 일부만 있는 것, 없는 것 등 다양하다. 유물은 토기류가 주를 이루고 철기류는 소량 부장된다. 돌무지덧널무덤과 비교해 유물의 부장량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동시기 조영된 돌무지덧널무덤보다 하위 계층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590번지 조사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주변에서 제사와 관련된 의례 유구가 다수 조사되었다. 의례 유구는 돌무지덧널의 둘레 도랑 또는 인접된 공지에 축조되었는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를 비롯해 그릇받침, 이형토기 등 특수토기를 매납하였다.

독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사이에 딸린 무덤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구덩이에 단독으로 독만 넣어 축조한 것과 구덩이와 독 사이에 돌덧널을 축조하거나 돌무지 시설을 보강한 것 등 다양한 모습이 확인된다. 고분군이 형성되는 서기전 1세기 대부터 축조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조영되는 6세기 대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된다.

독무덤에는 긴몸항아리, 큰항아리, 짦은목항아리, 손잡이달린항아리, 화로모양토기 등을 사용하였다. 독무덤의 구조는 두 개의 토기 주둥이를 붙여서 만든 합구식(合口式)이 주를 이룬다. 유물은 작은항아리나 손칼, 방추차, 구슬 정도만 부장되었으며 다른 무덤 형식에 비해 상당히 적다.

돌방무덤은 7세기 이후 축조되었는데, 524-1번지, 537-2번지, 575번지, 590번지, 906-5번지에서 조사되었다. 단독으로 자리하거나 2~3기가 군집을 이루는 모습이다. 단독으로 자리한 524-1번지 돌방무덤은 봉분 직경 14.1m로 둘레돌을 두르고 있으며 널길 통로를 남쪽에 두고 있다. 벽면에는 회를 바른 흔적도 조사되었고, 서벽에 붙여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주검받침을 시설하였으며 베개와 발받침도 확인되었다.

돌방 내에서 다수의 인물과 소 · 말 · 마차 등을 표현한 도용이 출토되었다. 906-5번지 돌방무덤은 봉분 지름 약 9.8m로 둘레돌을 먼저 쌓고 봉분을 쌓아 올렸다. 널길 통로가 왼쪽에 위치하며 동쪽 장벽에 붙여 주검받침을 시설하였다. 돌방 내부에서 도장무늬토기 1점이 확인되었으며, 둘레돌 주변에 뚜껑합, 뚜껑항아리 등이 매납되어 있었다.

널길 매몰토 내에서는 중국 월주요의 해무리굽완의 저부편도 출토되었다. 590번지 돌방무덤은 선대에 조성된 덧널무덤 사이의 공간에 축조되어 있으며 둘레돌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의 및 평가

경주 황성동 고분은 신라 무덤의 계기적인 변천을 모두 보여 주는 유적으로 신라 고분 연구에 있어서 양호한 편년 자료를 제공하며, 고분의 구조와 고분군 조성 방법 등 중심 고분군과 비교할 수 있는 핵심 자료이다.

아울러 서기 전후한 시기부터 고분군이 조성되기 시작하고 분묘 구역과 주거 · 생산구역이 각각 독립된 공간을 이루며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지니고 있어, 사로국(斯盧國) 형성 과정과 신라의 발전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경주 황성동 590번지 유적Ⅰ~Ⅴ』(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5)
『경주 황성동 590번지 유적Ⅰ~Ⅵ』(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4~2017)
『경주 황성동 897-1유적』(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4)
『신라 형성기의 유적』(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1)
『경주 황성동 575번지 고분군』(영남문화재연구원, 2010)
『왕경유적Ⅸ(경주 황성동 881-1번지유적)』(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09)
『원삼국시대 경주 황성동 유적의 성격』(영남문화재연구원, 2009)
『한국고고학전문사전(고분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경주 황성동 유적-강변로3-A공구 개설구간내 발굴조사보고서-Ⅰ~Ⅳ』(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
『경주 황성동고분군Ⅲ』(경주대학교박물관, 2003)
『경주 황성동고분군』(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 2002)
『경주 황성동고분군Ⅱ』(국립경주박물관, 2002)
『경주 황성동유적ⅠㆍⅡ』(국립경주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유적ⅢㆍⅣ』(경북대학교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유적Ⅴ』(계명대학교박물관, 2000)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긴급발굴조사보고Ⅲ)』(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8)
『황성동 601-2번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5)
『경주 황성동석실분』(국립경주박물관, 1993)
『경주 황성동유적 발굴조사보고』(국립중앙박물관, 1985)

논문

박형렬, 「4~6세기 신라 중심고분군 연구」(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이희준, 「경주 황성동유적으로 본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 사로국」(『신라문화』 38,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1)
최경규, 「삼한시대 경주 황성동집단의 공간구성과 성격」(『영남고고학』 39, 영남고고학회, 2006)
임동재, 「삼한시대 경주 황성동유적의 성격에 대한 연구」(동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주석
주1

토기, 석기 따위의 고대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지층.    우리말샘

주2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우리말샘

주3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 널길이 달려 있고 천장 구조가 다양하다.    우리말샘

주4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강자갈을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점토 따위의 흙을 입혀 다진 무덤. 신라 특유의 것이다.    우리말샘

주5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쓰여 지금까지도 일부 섬 지방에서 쓰이는데, 하나의 토기만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개 또는 세 개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6

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만든 무덤. 평양 부근의 낙랑 고분,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이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7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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