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수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이원선(李元善), 지모사(池模士), 찌모샤(Тимощя)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
사망 연도
1930년
출생지
강원도 횡성
주요 경력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2007)
관련 사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내용 요약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가계 및 인적 사항

고광수(高光洙)는 1903년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읍상리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3년 횡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20년 서울 중동학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중동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자 6월 중국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주요 활동

1921년 9월 돈화현(敦化縣)에 있는 상해파 공산당 만주 지부인 중령총회(中領總會) 북간도지방회에 입당하였다. 10월 연해주로 이동하였고, 1922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9월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코민테른 코르뷰로의 추천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만 3년 동안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 전략 전술을 수학하고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소비에트러시아 레닌주의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고, 졸업 직후 1925년 9월에는 러시아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1925년 10월 서울로 돌아와서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의 다수 중앙위원이 체포되거나 망명하자 1926년 1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26년 2월 합법 사상단체인 조선노동당에 참가하였으며, 노동당 내부 비밀 공산 단체인 주1(Spartakusbund, Spartacus League)’ 중앙간부가 되었다.

1926년 3월 양명(梁明), 한빈(韓斌), 이정윤(李廷允) 등과 함께 레닌주의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권오설(權五卨) 책임비서를 비롯한 고려공산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자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서울파의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합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8월 합동 고려공산청년회가 구성되었으며,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으나, 화요파를 지지하는 코민테른과 국제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국제공청) 동양부 담당관들의 반대로 승인을 얻지 못하고 시일을 지체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승인은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당 지도부를 승인받기 위해 1927년 2월 김철수(金錣洙)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2월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결정에 따라 귀국을 지시받았으나, 구체적인 귀국 일자는 알 수 없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ML파 조선공산당 세력이 큰 타격을 받자 3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복귀하였다. 7월 코민테른 및 국제공청과의 연락 관계 회복을 위해 양명과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고, 그해 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취소하자 만주로 활동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1929년 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5월에는 ML파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회의 중앙위원에도 선임되어 조중(朝中)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국내 정세 조사 및 당 재건 임무를 수행하였다. 9월 함경남도 동북부에 자리한 이원군에서 활동하다가 석탄 광산의 다이너마이트 도난사건을 수사하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직전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북청경찰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고문과 자해 후유증, 폐결핵으로 중병을 얻어 1930년 1월 3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출감한 지 5일 만인 2월 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광수 이력서」(러시아국립사회정치문서보관소, Ф. 495 оц. 135 д. 131)

단행본

임경석, 「희생자」,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

논문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1924~25년)」(『인문과학』 57, 2015)
박종린, 「1920년대 통일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한국사연구』 102, 1998)
주석
주1

1916년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정치 단체.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Karl), 룩셈부르크(Luxemburg, Rosa) 등을 중심으로 비전론(非戰論)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고, 1919년 1월 독일 공산당을 창설하여 무장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홍종욱(서울대학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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