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신사(高來神社)는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신사(神社)이다. 간미무수히노미코토[神皇産靈尊] · 아마쓰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彦穗邇邇藝命] · 진쿠왕후[神功王后] · 오진왕[應神王]을 모시고 있다. 이 신사의 유래와 관련해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고려향유래(高麗鄕由來)』(고려명진(高麗明津), 1931)에 의하면, 고구려의 약광(若光)이 처음 사가미만[相模灣]의 오이소[大磯]에 상륙하여 머물다가 무사시[武藏]의 고마군[高麗郡] 대령(大領)에 임명되어 오이소를 떠나자, 오이소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신사의 연중의례로 행해지고 있는 어선제(御船祭)는 약광이 오이소에 상륙하던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신사가 위치한 고려산(高麗山) 인근에서 고구려 이주민들의 것으로 보이는 횡혈식(橫穴式) 고분들이 300기 이상 발견되고 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716년 5월에 스루가[駿河] · 카히[甲斐] · 사가미[相模] · 카미츠후사[上総] · 시모츠후사[下総] · 히타치[常陸] · 시모츠케[下野] 등 7개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노쿠니[武蔵国]로 이주시키고 고려군(高麗郡)을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대로부터 이 신사와 그 주변 지역이 고구려 문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두 번째, 이 신사의 유래를 기록한 고문헌으로 1591년 정해(定海)가 작성한 『고려사일산건립기(高麗寺一山建立記)』가 있다. 여기에서는 진쿠왕후의 삼한 정벌 전설을 차용하여, 삼한 정벌을 도왔던 다케우치노수쿠네[武内宿禰]가 고구려 신을 일본에 옮겨 모시기를 청하여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는 유래가 나온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1191년에 편찬된 『상근산연기병서(箱根山緣起並序)』에도 전하는데, 진쿠왕후의 삼한 정벌 이후 백제명신(百濟明神)을 일주(日州)에, 신라명신(新羅明神)을 강주(江州)에, 고려대신(高麗大神)을 이곳 오이소로 옮겨 모시고 고려산(高麗山)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 1895년 12월에 작성된 「고사조사사항취조서(古社調査事項取調書)」에는 또 다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 신사는 본래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왕[神武王]이 개창한 곳으로서 일본 신화 속의 신 간미무수히노미코토를 비롯하여 진무왕의 증조인 아마쓰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를 모시다가 후에 삼한을 정벌한 진쿠왕후와 그의 아들 오진왕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사의 이름을 고려신사(高麗神社)에서 고래신사(高來神社)로 바꾸기 위해 1895년 11월 가나가와현청에 제출한 문서에는 이곳이 고려국의 번신(番神)을 제사지내는 신사가 아니며, 연중행사인 어선제도 삼한으로부터 공선(貢船)이 내항한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적고 있다.
고래신사의 유래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문헌에 따라 설명이 달라서 명확하게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고래신사는 창건 이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제사를 지내는 신과 그 성격이 변화되어 왔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이 신사의 명칭이 고려권현(高麗權現) · 고려사(高麗寺) · 고려명신(高麗明神) · 고려신사(高麗神社) · 고래신사(高來神社) 등으로 불리면서도 모두 일본에서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려(高麗)와 연관된다는 점,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신사 주변의 고구려 관련 고분이 300기 이상 존재한다는 점, 관련 문헌 등을 미루어 볼 때 이곳이 고구려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래신사에는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지장보살좌상(木造地藏菩薩坐像)과 옛 고려사가 보관하였던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