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분양향락도(郭粉陽享樂圖), 곽자의행락도(郭子儀行樂圖) 등으로도 불린다. 곽분양은 곽자의가 안록산의 난을 비롯한 국가 존망위기 때 세운 여러 공로로 인해 분양군왕(汾陽郡王)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일컬어지는 이름이다. 곽자의는 중국 역사상 유래가 드물 정도로 정치적, 군사적인 업적이 클 뿐만 아니라 85세로 죽기 전까지 아들 8명, 사위 7명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르고 자손들도 모두 잘되는 등 곽자의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세속적인 복락과 지위를 모두 누리면서 부귀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한 손자들이 많아 그들이 문안을 올리면 일일이 알아보지 못하고 턱만 끄덕일 정도였다는 일화로 다자다손(多子多孫)의 전형으로 이야기된다.
현전하는 작품들은 청록의 공필진채화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며, 손님들이 잔치에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 장소를 지나 궁궐 안채에서 끝이 난다. 왼쪽에는 폭포수가 있고 담 안쪽으로 원앙이 노니는 연못이 있으며 연못 위 정자 위에는 바둑 두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아래쪽에는 시동을 거느리고 잔치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중앙에는 주인공인 곽분양이 용상에 앉아 춤추는 무녀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주위에 아들, 사위, 처첩, 신하, 궁녀들이 시립해 있다. 오른쪽에는 중앙과 맞닿은 건물에서 곽분양의 부인이 앉아 연회를 바라보고 있으며, 궁궐 안채 각 처소에서는 여인들이 춤추고 있거나 머리를 손질하거나 수를 놓고 있고, 마당에는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다.
우리나라 곽분양행락도는 이제까지 알려진대로 중국 원본의 충실한 모사작품이라기보다는 중국에서 그려진 곽분양 주제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소설의 삽화나 화보 등 판화류의 영향을 받아 동시대의 궁중회화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당시 궁중의 화원들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1700년을 전후해 숙종이 쓴 『열성어제(列聖御制)』의 시문을 통해 곽분양행락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정조대 이후에는 『경도잡지(京都雜誌)』의 기록으로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가에서도 혼인할 때 곽분양행락도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02년에는 궁중에서 순조, 순원후 가례에 실제로 곽분양행락도가 제작, 사용되기에 이르며, 이후 왕실의 모든 가례에 사용된 대표적인 병풍화로 자리잡았다. 이 사실을 통해 곽분양행락도에는 단순히 의식적, 장식적 욕구 이외에 당시 번창하고 영속하려는 조선왕실의 절실한 소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