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 2월부터 관리들의 주구(誅求)에 항거하여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에 자극받아 광주에서는 11월 3일 부민(府民) 1,000여 인이 결미문제를 들고 봉기하였다.
여러 날 동안 운동을 벌였으나 수창자(首倡者)가 잡혀 처벌됨으로써 진압되었다. 광주는 서울과 가까운 곳이며 유수관(留守官)이 주재하는 사도(四都)의 하나이므로 당시 조정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하였다.
이 미디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에만 활용하도록 허가받은 자료로서, 미디어 자유이용(다운로드)은 불가합니다.
항목 내용 중 오류나 보충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 또는 미디어 설명에 수정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문의나 의견을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용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남겨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 시 아래와 같이 출처를 표시해 주세요.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