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일곡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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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이후 집터 · 독널 · 파수부토기 관련 생활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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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이후 집터 · 독널 · 파수부토기 관련 생활유적.
내용

일곡동은 동으로 삼각산(274m)과 서로 동자봉(147m) 사이의 세장한 계곡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주변에 영산강의 지류인 용봉천이 관통하고 있다.

용봉천 주변의 퇴적 평지와 구릉상에서는 모두 4곳에서 유적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유적은 주거지, 옹관, 지상가옥의 기둥구멍열로 추정되는 원형 구덩이 등이 있다.

주거지는 구릉의 사면이나 정상부에서 모두 4기가 조사되었다.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해 ㄴ자형으로 파고 설치되었다. 평면구조는 남북 장축으로 남쪽변이 북쪽변보다 약간 긴 사다리꼴의 말각방형이다. 규모는 길이 450∼640cm, 폭 320∼410cm이고, 깊이는 높은 쪽이 30∼40cm이다.

바닥시설은 모두 2∼5cm 정도 진흙다짐을 하였다. 소토부는 북쪽에 치우쳐 장타원형의 불탄 흔적만 있고 다른 시설이나 구조는 없으나 노지로 생각된다. 벽면을 따라 도랑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이중구연호, 장란형토기, 발형토기, 시루, 방추차, 파수부토기 등 다양한 토기가 있었고, 석기는 숫돌 1점뿐이다. 그 중 이중구연호는 옹관이나 토광묘 등 분묘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토기로 주거지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연대는 주거지의 특징과 출토유물을 볼 때, 원삼국시대인 2∼3세기로 추측된다.

옹관은 다지구의 퇴적평지에서 1기가 발견되었다. 단옹으로 구연부쪽를 높게 해 비스듬히 세워진 상태였다. 크기가 길이 60cm, 최대 폭 40cm인 호형토기를 이용한 옹관으로 저부에 인위적으로 원형 구멍을 뚫었다.

옹관의 구연부와 저부는 다른 토기를 깨서 구연부는 구연부쪽을, 동체는 바닥쪽을 각각 막았다. 타날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이며 짧은 목에 구연이 외반된 토기형태로 보아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토기이다.

원형 구덩이는 다지구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지상 가옥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는 개배, 대발, 잔, 완, 합, 토기 뚜껑 등 백제와 통일시라시대의 토기편들과 격자문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원형 구덩이는 유물 출토상태로 보아 교란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주변에서는 방추차, 석촉, 유구석부, 인장으로 생각되는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토제품은 방형의 바닥에 4조의 돌대가 돌려져 있으며, 손잡이부분에는 구멍이 있고 그 위에 홈이 있어 묶어 사용한 것이다. 형태상 인장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유구와 유물이 조사되었다. 유적 분포로 보면, 주거 터전을 청동기시대와 백제, 통일신라시대에는 천변 평지에, 원삼국시대에는 구릉에 마련하고 생활하였다.

참고문헌

『광주 일곡동 유적』(이영문·조근우·정기진, 목포대학교박물관·광주시립민속박물관·한국토지공사, 1996)
집필자
이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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