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한성부판윤 구수영(具壽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구희경(具希璟)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구순(具淳)이며, 어머니는 의신군(義新君) 이징원(李澄源)의 딸이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이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1560년 전적(典籍)이 된 뒤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3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지내고, 사인(舍人)을 거쳐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재직 중, 1567년 명종이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에 재직 중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0년 좌부승지가 되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으로부터 왕자를 호종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1594년 지중추부사, 이듬 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국문(鞫問)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왕자와 후궁을 시종해 성천에 피난했으며, 이어서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1602년 맏아들인 구성(具宬)이 유배되자 곧 사직하였다.
선조 때 신진 사류들의 원로 사류에 대한 탄핵이 심해질 때 대부분의 사류들이 뜻을 굽혔으나, 끝내 신진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을 받았다. 왕실과 인척이면서도 청렴결백하고 더욱 근신해 자제나 노복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죽은 뒤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632년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그의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되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