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공업화정책 ()

근대사
제도
만주사변을 전후로 강행되기 시작한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
목차
정의
만주사변을 전후로 강행되기 시작한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
연원 및 변천

1927년 5월 2일 일제는 자원국(資源局)의 설치를 공포하였다. 이것은 국가총동원 체제 수행의 중심 기관이던 기획원의 모체로서, 국가총동원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운용하려는 제반사항의 통할기관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1932년 4월부터 조선군(주한 일본군)사령부 안에 자원계 장교가 배속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장래에 예상되는 국가총동원 사태에 대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 결과 제6대 총독 우가키(宇垣一成)는 농산어촌진흥과 함께 남면북양(南棉北羊)·북선개척 등의 이른바 대륙병참기지화정책을 수행하였다.

대륙 루트 위에 제2의 일본 창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였던 대륙병참기지화정책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해소(일본화)에 의한 군수기지화로 요약된다. 따라서 그것은 강력한 정신동원작업과 표리일체하에서 수행되었다.

1935년 1월 천명된 농산어촌진흥운동은 관동대진재 이후, 즉 1923년 11월 10일 발포한 「국민정신 작흥에 관한 조서」의 취지에 기초한 국민의식 앙양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 식량자원의 증산계획이었다.

1933년부터 시작된 ‘면작(棉作)장려10개년 계획’, 1934년부터 시행된 ‘면양(緬羊)장려10개년 계획’ 등은 면(緬) 수입 적자가 2억 4천만 엔(1934년)이 될 정도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는 처지에서 제정된 일본군 피복 조달책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강행되기 시작한 우가키시대의 군수산업개발정책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지하자원 개발이었다. 이것은 1932년부터 시작된 북선개척15개년계획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북선개척15개년계획은 ① 북선 자원개발, ② 중·남선 인구의 이식, ③ 농촌문제의 해결, ④ 대만(對滿) 산업진출의 교두보 구축 등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광업개발정책에 던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산금(産金)의 장려정책에 가장 핵심을 두었다. 우가키는 1933년 1월 10일 「조선광업령개정」을, 그 해 8월 29일 「금 탐광(探鑛) 장려금교부규칙」, 기타 장려 법규를 잇달아 공포하였다.

그 결과 1929년의 광산액 2,648만 8,366엔에서 1933년도에 4,830만 1,468엔으로 격증되었다. 1931년의 육지면 7,872만 1,846근에서 1933년에는 1억 1,431만 3,478근, 재래면은 3,719만 1,440근에서 4,510만 2,096근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만주사변 무렵의 이러한 군수산업정책은 중일전쟁 이후, 전면적이고도 광범위한 형태로 강행되었다. 1937년 9월 9일 일본의회는 「군수공업동원법」을 발동하기로 가결하였다. 1918년 4월 16일 제정된 「군수공업동원법」은 국가총동원의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며, 전시에 있어서 군수품의 보급을 신속, 확실,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국내의 공업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 정부의 통제·운용 아래 공업력을 예속시킨 법률이다.

이와 함께 1938년 5월 5일 「국가총동원법」의 시행에 의해 군수물자 최우선의 군수공업화정책이 본격적인 단계로 돌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용

이 시기의 군수공업화정책은 일체의 인간 생산이 군수 산업이요, 일체의 시장상품이 군수용품이라는 대전제 밑에서 강행된 것으로, 이러한 대전제 밑에서는 군수·민수의 품목 구별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전분야·전품목에서의 민수의 절약·억제와 소비대체 등이 내용으로 되었다.

또한, 그것은 일본·조선·만주에서 일본·만주·중국으로,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되는 광역의 경제권을 블록으로 한 자급자족의 체제가 목표였다. 그리하여 군수 우선의 노무공급 체제가 확립되면서 산업의 입지적 재편성이 강행되기 시작하였다.

원료·생산·수송 등의 산업 여건을 참작한 공장 이전 및 신설, 또는 비료 공장의 폭약·독가스 공장화, 또는 민수 재봉 공장의 군복 공장화라는 식으로 산업전환이 강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조선의 공업화 정책은 수력발전 및 농업생산을 기초로 하면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수행되고 있었다. 물론, 군수 또는 군수전환을 목표로 하였는데, 각 분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방적공업 :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불황으로 본토에서 조업단축이 불가피할 때, 식민지적 저임금과 원료이용 목적에서 발달하였다. 동양방적·종연방적(鐘淵紡績)·조선방적·경성방적이 군피복 원료를, 노다피복(野田被服)·조선피복이 군복을 생산하였으며, 장갑·양말(군용) 등이 생산되었다.

② 피혁공업 : 조선피혁·와다나베피혁(渡邊皮革)·유풍제혁(裕豊製革) 등이 피혁과 군화를 생산하였다. ③ 시멘트공업 : 오노다(小野田)·아사노(淺野)·조선시멘트 등이 토치카 등 작전을 위한 시멘트를 생산하였다.

④ 제철공업 : 미츠비시(三菱)가 겸이포제철을 운영하였다. 일본 고주파중공업은 고주파 전기제철로 고속도강·특수강을 생산하였다. 1942년부터는 문평(文坪)·시천(是川)·양양·평양·서울 등지에서 소형 용광로에 의한 제철 공장이 설립되었다.

⑤ 병기산업 : 평양병기제작소가 탄약과 치중차량(輜重車輛) 등을, 인천육군공창은 소총탄·소구경포탄·수류탄·총검·군도·소총을 생산하였다. 월 생산량은 소총 4,000정 정도이며, 생산 총액은 1942년에 2700만엔, 1944년에 4500만 엔이었다.

⑥ 조선공업 : 1936년에 부산에 미츠비시조선소가 개설되었다. 기범선(機帆船)의 제조를 위하여 조선조선(원산)·조선디젤(군산) 등이 설립되었으나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⑦ 항공기공업 : 쇼와비행기(昭和飛行機)(평양)가 1936년부터 목제연습기를, 신용욱(愼鏞頊)은 진해에서 기체 부분품 등을 생산하였다. 박흥식(朴興植)의 조선비행기(안양)는 목제 연습기를 생산하였으나 완제품을 내기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⑧ 액체연료공업 : 부산·목포·군산·인천·문평·진남포에 저유시설(貯油施設)이, 아오지에는 인조석유공장이 있었다. 조선무수주정(신의주)은 목재를 원료로 무수주정(無水酒精)을,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도 공장은 제주도의 고구마로 부탄올을 생산하였다.

⑨ 경금속공업 : 미쓰이경금속(三井輕金屬)(신의주)·쇼와전기공업(진남포)·아사히경금속(旭輕金屬)(강서) 등이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을 생산하였다.

⑩ 식품공업 : 조선관철공장(원산)이 정어리 통조림을, 충주에서 쇠고기, 나주에서 죽순, 제주에서 쇠고기와 수산물통조림을 생산하였다. 서울·평양·마산, 그 밖의 각처에서는 군수용 일본 청주가 납품되었다.

참고문헌

『時局解說百科要覽』(平凡社, 1937)
『朝鮮施政25年史』(朝鮮總督府, 1935)
『朝鮮軍槪要史』(朝鮮軍殘務整理部, 프린트刷·未公刊)
집필자
임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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