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에서 부호인 정주(定周)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흙을 만지기 좋아하였고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1936년 함흥제1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업체가 있는 춘천에서 병약한 몸을 요양하면서 1942년에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히다치철공소(日立鐵工所)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동경의 사설 아틀리에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고국으로 밀입국하여 서울에 정착한 뒤,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광복 후 194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에 입학, 부르델의 제자로서 일본 조각계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던 시미즈(淸水多嘉示)를 사사하였다. 당시 시미즈는 부르델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그 또한 부르델(Bourdell, E.)에 깊이 매료되어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재학 시절부터 일본 이과회전(二科會展)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53년에는 후배인 가사이(河西智)와 결혼하였고, 영화사의 부품 제작 일을 하면서 작업을 지속해 오다가 어머니의 병 때문에 1959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65년 서울의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으나 몇몇 뛰어난 감식가를 제외하고는 화랑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다시 1968년 동경의 니혼바시화랑(日本橋畫廊)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 일본 미술계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명동화랑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의 초대 개인전 형식으로 제3회 개인전이 열렸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과 육신의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73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74년에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유작전이 열렸다.
주로 인물이나 말, 닭 등의 동물상을 흙으로 구워서 제작한 그의 작품 세계는, 작가의 정신적인 구도 자세와 사물에 대한 인지를, 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감적이고 원초적인 상태에서 파악하여 표현하고 있다.
불필요한 장식물을 극도로 생략하면서 작가와 대상의 정신적인 합일을 집약적으로 추구하여, 우리 나라 근대 조각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자각상 自刻像>·<소녀의 얼굴>·<여인상> 등을 들 수 있다.